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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九龍浦 日本人 家屋路)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21. 6. 10. 04:04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九龍浦 日本人 家屋路)

     

    동해 최대의 어업전진기지였던 구룡포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일제(日帝)가

    구룡포항을 축항(築港)하고 동해권역의 어업을 관할하면서 일본인들의 유입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현재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가 위치한 거리에는 병원과 백화상점,

    요리점, 여관 등이 늘어서고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지역상권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남아있던 일본 가옥들은 각종 개발과정에서 철거되고 오랜 세월동안 훼손되면서

    과거 우리 민족에게 아팠던 역사의 산 증거물이 사라져가는 실정을 맞았다.

    이에 포항시는 지역 내 가옥을 보수, 정비하여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풍요했던 생활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일본에 의해

    착취되었던 우리 경제와 생활문화를 기억하는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조성했다.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정비 사업을 통해 457m 거리에 있는

    28동의 건물을 보수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는 

    2012년 12월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제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최우상을 수상하며, 

    도심활성화 사업의 우수사례로 선정됐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제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 최우상 수상기념

    2012년 12월 국토해양부

     

     

    KBS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 - 포토존

     

    동백꽃 필 무렵 포토존

     

    포항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는 2019년 9월부터 11월까지 방영된

    KBS2 TV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입니다. 

     

     

     

    구룡포구판장

     

     

    구룡포공원 입구 계단 돌기둥(九龍浦公園 入口 階段 石柱)

     

    이곳 공원입구 계단과 돌기둥들은 1944년도 일본인들이 세웠으며,

    돌기둥은 왼쪽 61개, 오른쪽 59개 등 모두 120개가 있다.

    돌기둥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구룡포 이주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패전으로 일본인들이 떠난 이후 구룡포 주민들은 시멘트를 발라

    기록을 모두 덮어버리고 돌기둥을 거꾸로 돌려세웠다.

    그 뒤 1960년 구룡포 주민들이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할 충혼각을 세우는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을 다시 앞뒤로 돌려세운 돌기둥에 새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KBS2 TV '동백꽃 필 무렵' 포토존

     

     

    용이와 아라 (2017, 박준상)

    도자조형작품 – 조형흙, 철판재, 분체도장

     

    지역명 ‘구룡포’에서 알 수 있듯이 열 마리 용 중 승천하지 못한

    한 마리의 용을 스토리텔링한 용이소년과 그의 친구 아라소녀.

    멀리 보이는 바다는 소년의 푸른 꿈을 상징하며 고깃배를 타고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을 서정적으로 담고 있다.

     

     

     

    충혼탑(忠魂塔)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은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신명을 바친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의 바탕 위에서 이룩되었다.

    이곳 충혼탑은 6.25전쟁 등 대한민국을 수호하시다 장렬히 산화하신

    포항(당시 영일)지역 출신 전몰군경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0년 건립하였으나 당시 열악한 재정 상황 등으로 탑신의 받침대가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설치한 구조물로 그 위에 충혼탑이 설치되어 오다가

    2007년 9월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재건립된 현충시설물이다.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호국영령 앞에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면서

    그분들의 숭고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모두 가슴속에 아로새겨야 한다.

     

     

     

    용왕당(龍王堂, 왼쪽)과 충혼각(忠魂閣, 오른쪽)

     

    용왕당(龍王堂)

    용왕당은 구룡포 어민들의 풍어와 안전조업을 기원하기 위한 제당이다.

    일반적으로 용왕당에는 여신인 용신할머니 용왕부인을 모시는게 보통이나

    구룡포 용왕당은 남신인 사해용왕을 모신 것이 특징이다.

    용왕당 건물은 일본인들이 구룡포에 정착하며 건립했던 신사를 철거하고 1956년 신축 하였다가

    건물이 낡고 노후가 심하여 2008년 철거하고 새로이 한옥 건물로 신축하였다.

     

     

     

     

    용의 승천(龍의 昇天) - 새빛 구룡포

    재질: 청동(브론즈), 화강석

    제작업체 주식회사 이상, 주식회사 예홀

     

    구룡포는 신라 진흥왕 때 지금의 용주리에서 용 아홉 마리가

    승천한 포구에서 유래되었기에 지역을 특화할 수 있는 값진 유산이다.

    구룡포의 역사를 상징하는 작품은 구룡포의 개성적 유래와 더불어

    새롭게 부활하는 새빛을 상징하며 지역의 랜드마크로서 디자인하였다.

    작품은 용들이 서로 어울어져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으로서

    용의 신성함이 하늘의 점지를 받은 구룡포를 상징하며,

    석재작품으로 표현된 용의 이미지는 동해바다의 물결속에 용들이 모여드는 형상으로서

    동해바다의 기운이 구룡포에 모여서 승천하는 형상으로 연결된다.

    용의 승천은 구룡포가 하늘길로 통하는 유일한 땅임을 의미한다.

    작품은 푸른바다 동해와 구룡포팔경, 근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문화마을의 원형을 간직한 구룡포의 영원한 부활을 기원하며

    용의 신성한 기운이 이 땅의 새빛으로 구룡포의 비상을 상징한다.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十河彌三郞 頌德碑)

     

    이 비는 일본인 “十河彌三郞(도가와 야스브로)”를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라고 한다.

    “도가와 야스브로”는 일제강점기에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개설 등에 관여한 사람으로,

    일본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을 가져와

    해방 전인 1944년 경에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송덕비는 패전 후 일본인들이 돌아간 후 구룡포 주민들이

    시멘트로 덧칠하여 현재 비문의 내용은 알 수 없다.

     

     

     

    金性浩 商店(김성호 상점)

     

    일제 강점기에 수산무역업에 종사한 김성호씨 상점이었다.

    활발한 무역업을 통해 지역경제에 기여했다고 하며 현재 건물은 가게로 사용하고 있다.

     

     

     

    구룡포 100년

     

    낡은 지붕과 붉은 벽돌, 뻥뚫린 나무창살...

    무엇하나 오래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일본식 가옥거리에 들어서면 마치 빛바랜 풍경사진을 보는 것 같다.

    100 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일본가옥들이

    1900년대 초반으로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 자리잡고 있다.

     

     

     

    옛 일본가옥전도(慶尙北道 九龍浦市街圖)

     

     

    구룡포 근대역사관(九龍浦 近代歷史館)

     

    근대역사관의 자료에 따르면 가가와현의 어부들이

    처음 한반도 해역에 나타난 것은 1880년~1884년 경으로 알려지고, 

    당시 가가와현의 세토내해는 어장이 좁아 어부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힘없는 어부들은 더 넓은 어장을 찾아 먼 바다로 나섰고

    풍부한 어족자원을 품은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고기가 풍부하니 돈이 모일 수 밖에 없었을 터다.

    선박경영과 선박운업, 통조림 가공공장 등으로 부유해진 일본인들은

    집을 지었고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음식점, 제과점, 술집, 백화점, 여관 등이 들어선 거리는 날로 번창했고

    구룡포 최대 번화가로 성장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일본식 가옥들로 당시 구룡포의 부흥기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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