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봉(鶯峰) 2020. 5. 11. 04:30

광희문(光熙門)


광희문은 1396(태조 5) 한양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

1711(숙종 37)에 고쳐 쌓았으며, 1719(숙종 45)에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光熙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문 이름은 광명의 문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水口門)이라 불렀으며,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흥인지문)과 남대문(숭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남소문 건립 후 의경세자(懿敬世子 : 성종의 아버지德宗)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

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豆毛浦)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仁峴洞)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霓)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344 (광희동 2)



한양도성(漢陽都城)과 사대문(四大門), 사소문(四小門)


한양도성(사적 제10)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1396),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肅靖門),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 돈의문(敦義門)이며,

4소문은 서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彰義門), 혜화문(惠化門), 광희문(光熙門), 소의문(昭義門)이다.

이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을 두었다






















광희문(光熙門)


한양도성의 동남쪽 문으로, 시구문 또는 수구문이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본래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이곳에 고쳐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