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곡지(官谷池)와 은휴정(恩休亭)
은휴정(恩休亭) - 임금의 은혜로 휴식을 얻게 되다.
월천 권경상(月泉 權卿相)의 글씨로 정자에 휴(休)자를 쓰는 데는 사연이 깊다.
만족을 아는 삶은 지향한 문인들은 쉰다는 뜻의 휴(休) 자를 당호로 즐겨 사용했다. 당(唐)
나라 사공도(司空圖)는 재주를 헤아려 보아 부족하면 물러나야 하고,
분수를 헤아려 보아 넘치면 물러나야 하고,
늙어서 정신이 혼미해지면 물러나야 한다며 삼휴정(三休亭)을 짓고 은거했다.
황정견의 사휴정시서(四休亭詩序)는
“맛없는 차와 거친 밥을 먹고 배부르면 쉬고, 찢어진 옷으로 한기를 막아 따뜻하면 쉬고,
먹고사는 것이 편안하고 하는 일이 적당하면 쉬고,
탐내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면서 늘그막이 되면 쉰다.”고 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있었다.
손순효(孫舜孝)의 칠휴정(七休亭), 윤관(尹寬)의 삼휴정(三休亭)이 그러한 예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1485~1541) 역시
자신의 정자를 은휴정(恩休亭)이라 일컬었다. 임금의 은혜로 휴식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묵공옹 정언황(默拱翁 丁彦璜, 1597~1672)도
말년에는 원주에 내려가 은휴정(恩休亭)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면서 조용하게 지냈다.
(안대회, 이종묵, 정민, 『매일 읽는 우리 옛글』)
은휴정은 정조대왕이 참석하고 초시(初試)를 시행한 구전이 전해오며,
안동권씨 화천군파 화릉군 묘소 위에 있었으나 멸실되어
현재 150여 미터 아래에 재실을 신축하면서 새로 건립하였다.
蓮池事蹟(연지사적)
관곡지(官谷池)
관곡지는 가로 23m, 세로 18.5m 정도의 규모이며,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형태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전통 연못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관곡지(官谷池) - 시흥시 향토유적
관곡지는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인 강희맹(康希孟 1424~1483)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강희맹은 중앙의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음에도 농업의 발전과 농민들의 삶에 깊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는데, 세조 9년(1463)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경(南京)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 들러
당시까지 국내에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연꽃씨를 가지고 귀국하게 되었다.
강희맹이 채취해 온 연꽃은 전당홍(錢塘紅)이라는 품종으로, 다른 연꽃과는 달리
꽃의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꽃의 끝부분은 담홍색을 띠는 아름다운 연꽃이었다.
강희맹은 이 연꽃을 안산군 초산면 하중리의 작은 연못(현, 시흥시 하중동 관곡지)에 처음 심었는데,
연꽃이 차츰 인근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에 의하면 이를 계기로 3년 뒤인
세조 12년(1466년)부터 안산군의 별호를 연성(蓮城), 즉 '연꽃의 고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관곡지는 강희맹의 사위였던 권만형(權曼衡)의 가문(안동 권씨 화천군파 종중)에서
오늘날까지 소유ㆍ관리해오고 있는데,
조선 전기에는 재산에 대한 자녀의 균분(均分) 상속이 이루어졌고,
관곡지 일원의 토지가 강희맹의 딸에게 분재(分財)되어 사위 가문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강희맹이 관곡지에 전당홍을 심은 후 38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연못에 수초(水草)가 성하고 황폐해졌는데. 헌종 10년(1844)에 안산군수로 부임했던
권용정(權用正)이 선조들의 고사(故事)를 확인하고 이듬해 봄 장정들을 동원하여 연못을 준설,
여름이 되자 중국 전당의 것과 같이 연꽃 잎 두 줄기가 자라나게 되었다.
권용정은 당시 경기도관찰사였던 이계조(李啓朝)에게 서목(書目)을 올려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고 연못의 관리를 위해 연지기(蓮直) 6명을 둘 것을 청하였는데,
이 서목이 받아들여져 관곡지에는 하중리 주민 6명이 연지기로 선발되었으며,
결원이 생길 때에도 마을 주민이 대체하도록 조치되었다.
연지기들에게는 각종 노역(勞役), 포세(布稅), 양곡세(糧穀稅) 등이 면제되는 특전이 있었으며,
오로지 관곡지만을 전담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세심한 관리로 인해 관곡지의 전당홍은 사라지지 않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연꽃이 만개하는 여름이 되면 변함없이 그 우아한 자태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권용정이 관곡지의 유래와 준설 경과,
연지기 배치 등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여 「연지사적(蓮池事蹟) (헌종 12년, 1846)」과
「연지수치후보초(蓮池修治後報草)」라는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앞서 언급한 안산군수 권용정과 경기도관찰사 이계조 사이의
「안산군수 서목(書目) (헌종 11년, 1845)」과 이로부터 38년 후 연지기 배치 사실을 재확인한
「안산군 완문(完文) (고종 20년, 1883)」, 가문 소유의 나무를 팔아 연못을 준설한 후
안동 권씨 종중에서 직접 작성한「연지준지기(蓮池浚池記) (광부 4년, 1900)」등의
고문서가 남아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 관곡지의 가치를 뒷받침하고 있다.
관곡지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 정도이며,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형태) 전통 연못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