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史蹟) 연천 숭의전(漣川 崇義殿)
하마비(下馬碑)
이 비 앞으로 지나갈 때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의미의 표석으로서
주로 궁궐, 향교 또는 유명한 성인들의 사당 앞에 세워 경의를 표하였다.
이 하마비는 최근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홍살문(紅살門)
홍살문은 능(陵) · 원(園) · 묘(廟) · 궁전(宮殿) · 관아(官衙) ·
향교(鄕校) · 사당(祠堂)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 문’이라는 뜻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홍살문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해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숭의전 어수정(崇義殿 御水井)
숭의전 어수정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 877~943, 재위 : 918~943)이
물을 마신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왕건은 궁예(弓裔)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당시 송악)과 철원(당시 태봉)을 왕래하면서
중간지점이었던 이곳에서 쉬어가며 물을 마셨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곳 숭의전 자리에 왕건의 옛집 또는
왕건이 세운 앙암사(仰巖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평화누리길 11코스(임진적벽길)
거리 : 약 19km, 소요 시간 : 약 5시간 20분
숭의전지 – 당포성 – 동이리 주상절리 – 소우물다리 –
임진강 새롬랜드 평화누리길 홍보관 – 허브빌리지 – 군남 홍수조절지
고려 역사가 숨쉬는 숭의전 시작하여 임진강 중상류에 형성되어 있는
수직형 주상절리의 절경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야생화와 돌단풍이
가을에는 갈대길이 조성되어 다양한 경관을 즐길 수 있다.
느티나무
숭의전 입구 담장 옆에 8백 년 되었다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있고
나무 아래에 단을 설치해 두어 제례 때 사용하고 있다.
사적(史蹟) 연천 숭의전(漣川 崇義殿)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을 비롯하여
나라를 부흥시킨 4명의 왕들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사당이다.
조선 초기 처음 사당이 건립되어 1451년(문종 1)에 숭의전이라 이름 지어졌으며
이후로 숭의전의 관리와 전례도 고려 왕조의 후손에 맡겨졌다.
숭의전의 설치 배경에는 조선이 유교국가로서 역대 시조의 의례체계를 정비한 과정과
더불어 고려 왕족 및 고려 유민 등에 대한 회유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이해된다.
숭의전 건립 이래 수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가 이어져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숭의전 복원은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수년에 걸쳐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숭의전 대제가 이어지고 있다.
숭의전은 고려시대 옛 왕조의 영광과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사적 제223호 숭의전(崇義殿)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香), 축(祝, 축문), 폐(幣, 예물), 제복,
륜관, 홀, 목화, 관대, 폐옥, 후수, 사모 등을 보관하고
제례 시에 헌관(獻官), 집사(執事)를 분정(分定)하는 업무를 수행하며
제례 전반에 대한 습의(習儀)를 행하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所思(소사)
東林送客處(동림송객처) : 동림에서 객을 보내는 곳
月出白猿啼(월출백원제) : 달 뜨고 흰 잔나비 우네
笑別廬山遠(소별려산원) : 웃으며 떠남에 여산이 멀어지니
何煩過虎溪(하번과호계) : 어찌 호계를 지나는 걸 꺼려하리오.
高麗太祖御筆(고려태조어필)
태조 왕건이 916년 궁예의 태봉국을 공격할 무렵에
유덕양에게 써준 이태백(李太白)의 시(詩) 두 편 중 한 편으로,
이 시(詩)는 "동림사 스님과 작별함(別東林寺僧)"이라는 이백(李白)의 시로 알려져 있다.
高麗 太祖 王陵(고려 태조 왕릉) 顯陵(현릉) - 개성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祭需)를 준비하고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정전 건물과는 구분되는 담장이 둘려져 있다.
숭의전 제사는 생식 제례이기 때문에 전사청에는 굴뚝이 없다.
숭의전(崇義殿)
1397년(태조 6)에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太祖)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고 한다.
신도(神道)
중앙의 계단은 신도라 하여 전각에 모신 신(神)이 다니는 길이라 해서 신도라 일컫는다.
관세위(盥洗位)
향사(享祀) 때 헌관(獻官)이 사당에 들어가 제향의식을 행하기 전에
손씼을 대야를 받쳐놓을 대를 만든 것으로
일반적으로 돌기둥을 세워 그 위에 관분(대야)을 올려놓는다.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고려 충신 16인은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충(趙沖),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이다.
이안청(移安廳)
숭의전의 청소 및 보수공사 시에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위패를 옮겨 모실 때는 이안제(移安祭)와 환안제(還安祭)를 올려 고유례(告由禮)를 행했다.
고려 왕실을 지키는 나무(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조선 문종 2년(1452) 왕씨 자손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숭의전(崇義殿)은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이성계가 세웠다고 한다.
이 나무가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귀가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고 한다.
보호수(느티나무 2그루) 고유번호 : 연천-6
수령 : 약 600년, 수고 : 20m, 나무둘레 : 390cm
지정일자 : 1982. 10. 15.
숭의전 - 시인 전윤호 作, ⟨봄날의 서재 중⟩
왕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고려에서 조선을 지나
아직도 입시 중인 신하들
나라는 사라져 어디에 있나
개성은 길이 막히고
잠두봉 아래 임진강만 흐르는데
대문 앞 오백 살 먹은 느티나무
아직도 희망이 남아
솔부엉이 부부 새끼 둘 품었다
부엉부엉 연천 하늘을 날아
철조망 넘고 시간을 건너
비단 배 넘치는 벽란도로 가려나
왕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신 사당
평양 숭령전(平壤 崇靈殿) – 한민족의 시조 단군(檀君)과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평양 숭인전(平壤 崇仁殿) -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
경주 숭덕전(慶州 崇德殿) -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직산 숭렬전(稷山 崇烈殿) -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
연천 숭의전(漣川 崇義殿) - 고려의 시조 태조와 현종, 문종, 원종 및 고려의 충신 15인
고려 왕족의 수난사
왕씨에게 불어닥친 씨바람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 왕족의 수난은 개경에서 쫓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392년 10월 13일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건립하였으며
왕우의 아들 조와 관은 왕(王)씨 성을 뺏기고 어머니의 성인 노(盧)씨를 따르게 하였다.
1394년 1월 고려 왕족을 피바람으로 몰아넣는 사건이 발생한다.
“맹인 이흥무의 점괘 사건”으로 불리는 이 희대의 참극은
밀양의 유명한 점쟁이인 맹인 이흥무에게 조선의 개국공신인
박위의 명을 받은 김가행과 박중질이 찾아와
“고려 왕조 공양왕의 명운이 우리 주상전하 보다 누가 낫겠는가?”라며 점을 치게 하니
이흥무는 “남평군 왕화의 명운이 귀하다 하고,
그 아우 양평군 왕거가 그다음이 된다.”라고 점을 쳐 주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1394년 4월 주모자인 김가행, 박중질, 이흥무 등이 참수되고 연루된
왕화, 왕거 역시 참수형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 참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삼척, 강화, 거제에 살던 다른 고려 왕족에게까지 미쳐
강화, 거제도의 앞바다에 고려의 왕족들을 모아 모두 수장하여 죽이고,
전국 곳곳을 수색하여 왕씨들을 참수하였다.
왜 연천의 마전에 숭의전을 세웠을까?
연산군의 폭정에 조강(祖江)에 몸을 던진 당대의 뛰어난 시인 정희량(鄭希良, 1469~1502)이
마전(麻田)의 한 객관에 머물며 남긴 시를 보면 당시까지만 하여도
마전은 매우 궁벽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임을 알 수 있다.
왜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임진강변의 외딴 시골마을에
태조 이성계는 전조(前朝)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을 세웠을까?
寂寞痲田郡(적막마전군) 적막한 마전군
何年館宇開(하년관우개) 어느 때 관아를 지었나
頹垣靑遍草(퇴원청편초) 무너진 담에 푸른 풀이 더북하고
壤壁綠生苔(양벽록생태) 부서진 벽에 파란 이끼 끼었네
(중략)
太守無公事(태수무공사)태수는 공무가 없어서
琴軒晝日遲(금헌 주일지) 거문고 타는 동헌이 대낮에도 한가하다.
이는 마전의 앙암사(仰巖寺)가 고려 태조 왕건이 자주 들러
기도를 드리던 기도처(원찰)이었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이 궁예(弓裔)의 휘하에 있을 때 개경에서 철원 궁성으로 가는 길은 180리로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마전에 이르면 날이 저물어 하루를 쉬어가야 했다.
임진강변의 잠두봉 중턱에 자리 잡은 앙암사는 개경에서 딱 90리 지경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한적하여 기도처로서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태조 왕건은 하루를 쉬어가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종묘를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마전군(麻田郡)의 앙암사에 두게 함으로써
전조를 예우한다는 명분과 개경 밖으로 전조의 흔적을 지워 유폐시킴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예방하는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었다.
숭의전의 연혁
묘전(廟殿)이 설립되는 과정
역성혁명을 통해 왕조를 찬탈하였지만 고려의 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조선이 개국하자 후대의 불안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대사헌 민개의 주청으로
개경 내 거주하던 모든 고려의 왕족들은 개경에서 쫓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 두 번째 항목의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천명하며
공양왕의 아우 왕우와 두 아들 조 와 관 에게 경기도의 마전을 주고
귀의군에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태조 1년(1392년) 개경에서 고려 태조의 위패와 동상을 마전으로 옮긴 후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함으로써 고려조 8대왕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전 왕조에 대한 예우를 중시했던 태조 이성계가 죽자
전조에 대한 신하들의 예우는 점점 더 소홀해져 갔다.
심지어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에는 팔위(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고 봄, 가을에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52년 문종 대에 이르러 허물어가는 사당을 고쳐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인을 함께 사당 내에 배향하도록 하니
비로소 역대 시조제의 하나인 숭의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숭의전 건물의 배치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다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여 1971년 그 터를 사적 제223호로 지정하고
다음 해부터 복원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숭의전 잠두봉 암각문
강건너 삼화리에서 이곳을 보았을 때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잠두봉(蠶頭峯)이라 불리게 되었다.
임진강의 침식작용으로 잠두봉이 임진강에 면한 곳은 수직 절벽이 생겨났는데,
어떻게 새겼는지 이곳에는 한 수의 칠언절구가 남아있다.
중작 숭의전(重作 崇義殿) 숭의전을 중수하고
려조사궁사백추(麗祖祠宮四百秋) 숭의전을 지은 지가 사백년이 되었는데
수교목석갱신수(誰敎木石更新修)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강산개식흥망한(江山豈識興亡恨)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오
의구잠두출벽류(依舊蠶頭出碧流)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있구나
주세상심만월추(住歲傷心滿月秋) 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여금위군묘궁수(如今爲郡廟宮修)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성조갱걸려생석(聖祖更乞麗牲石)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유여징파만고류(留與澄波萬古流) 아무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호)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이 시는 1789년(정조 13) 마전군수였던 한문홍(韓文洪)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담긴 무상함을 시로 지어
숭의전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이 시를 새겨 두었다.
숭의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