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사적, 김포 덕포진(史蹟, 金浦 德浦鎭)

앵봉(鶯峰) 2021. 12. 23. 20:13

덕포진 전시관

 

 

 

사적, 김포 덕포진(史蹟, 金浦 德浦鎭)

 

덕포진은 강화해협을 통해 수도 서울에 진입하려는

외세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조선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체 면적은 48.794㎡로 이곳에는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었으며,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79년(숙종 5년)에 광성보(廣城堡),

덕진진(德津鎭), 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되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 때는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던 격전지로써,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빨라 손돌목(孫乭項)이라 부르기도 하며,

1981년 발굴과 복원사업을 하여 전시관에는 중포(中砲) 1문과

소문(小砲) 1문이 고정 포대에 거포(据砲)된 채 전시되어 있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

 

덕포진은 조선시대 해안지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진영(鎭營)으로

처음 세워진 시기는 선조 대(재위 1567~1608)로 추정된다.

강화에 소속되었다가 1666년(현종 7) 통진으로 옮겨 소속되었다.

1862년(숙종 8)에 강화부 주진(主鎭)으로 승격되어 영종도와 안흥진을 관장하였다.

강화의 덕진진(德津鎭), 광성보(廣城堡)와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이곳은

바닷길을 통해 한성(漢城, 현재의 서울)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자연 지세를 이용해 포대를 축조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 때는 프랑스 함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때는 미국 함대와 싸운 격전지이다.

1980년 발굴 조사에서 포대(砲臺) 3곳, 돈대터(墩臺址), 파수청(把守廳) 건물터 등을 발견하였다.

포대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제조한 중포(中砲) 4문, 소포(小砲) 2문, 포탄이 출토되었다.

파수청은 지휘소이자 포를 쏘기 위한 불씨를 보관하는 장소로,

파수청 건물터에서는 화덕 자리가 발견되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도 출토되었다.

 

 
 

덕포진 ‘가’ 포대(砲臺)

 

가포대(약물터)는 총 7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화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다.

1980년 발굴조사 당시 중포(中砲) 2문이 발견되었는데,

이중 1문은 고정식 포가(砲架 : 포 받침대)에 걸려있는 채로 발굴되었다.

각 포에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포의 무게, 화약의 용량과 함께

고종 11년(1874년 5월)에 운현궁에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덕포진 ‘나’ 포대(砲臺)

 

나포대(원들터)는 총 5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화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德津鎭)의 남장포대(南障砲臺)를 향하고 있다.

1980년 발굴조사 당시 5번째 포대에서 고종 11년(1874) 만들어진

소포(小砲) 2문과 중포(中砲) 1문이 함께 묻혀 있는 채로 출토되었다.

 

 

 

덕포진 ‘다’ 포대(砲臺)

 

다포대(굽두리)는 총 3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화 덕진진(德津鎭)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다.

다포대는 지붕이 기와로 되어 있는데 발굴 당시 발견된 기와에 근거해 복원한 것이다.

1980년 발굴조사 당시 고종 11년(1874)에 만들어진 중포(中砲) 1문이

고정식 포가(砲架 : 포 받침대)에 걸려있는 채로 발굴되었다.

 

 

 

덕포진 파수청터(德浦鎭 把守廳址)

 

이 유적지는 1980년 덕포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건물터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며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발굴 당시 7개의 포탄과 조선시대의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으며,

건물터 안에는 주춧돌과 화덕이 발견되었다.

이 건물은 포대(砲臺)와 돈대(墩臺)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쓸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將臺)로 생각된다.

 
 
 

손돌 묘(孫乭 墓)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뱃사공 손돌의 무덤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입하여 왕이 강화도로 피난을 갈 때

이 지역의 물길을 잘 알던 뱃사공 손돌의 안내로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을 치자,

왕은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목을 베라고 명령을 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일러준 뒤 참수되었다.

바가지를 따라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왕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충직한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후히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때부터 이 좁은 물길의 이름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마다 손돌의 기일(忌日)인 10월 20일에 불어오는 추운 바람을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한이 서린 바람이라 하여 ‘손돌이 바람(孫乭風, 孫石風)’이라 부르고

이때의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고 부른다.

원래 이곳에는 손돌을 모시던 사당이 있어 제를 올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제사도 중단되었다.

그 후 1970년에 주민들이 손돌 묘를 세우고 다시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의 주관으로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鎭魂祭)를 지내고 있다.

 

 
 

덕포진 돈대가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는

강화의 광성보(廣城堡), 용두돈대(龍頭墩臺)가 조망된다.

각각 해안 쪽으로 돌출된 지형인 덕포진 돈대와 용두돈대 사이의 해협은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유래하여 ‘손돌목(孫乭項)’이라고도 불리는데,

강화해협 중에서 가장 폭이 좁고 물살이 거센 곳이다.

자연지형을 이용한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덕포진 돈대터(德浦鎭 墩臺址)

 

이곳은 덕포진에 속한 돈대의 터다.

돈대는 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곳에

보루를 만들고 화포를 비치한 소규모 방어 시설물이다.

덕포진은 조선시대 해안지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진영(鎭營)으로

처음 세워진 시기는 선조 대(재위 1567~1608)로 추정된다.

덕포진의 위치는 서해에서 강화만을 거쳐 수도 한성(오늘날 서울)을

침공하려는 외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또한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 함대, 신미양요(1871) 때는 미국 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이기도 하다.

1980년 발굴조사 당시 이곳에서 돈대를 위한 시설의 하부 구조가 확인되었으나,

돈대의 설치 시기는 알 수 없다.

이곳은 해안 쪽으로 돌출된 지형이어서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의 덕진진 남장포대, 광성보 용두돈대와 삼각 대형을 이루는 중요한 지점이다.

 

 

 

덕포진 돈대가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해안 쪽으로 돌출되어

강화의 주요 관방 시설들이 한눈에 조망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강화해협(염하)을 사이에 두고 왼편으로는 강화의 초지진(草芝鎭)이 보이며,

강화의 덕진진(德津鎭), 남장포대(南障砲臺)와 마주하고 있다.

멀리 정족산과 마니산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