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돈대(龍頭墩臺)
손돌목(孫乭項, 손돌의 한숨, 손돌의 추위)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 섬과는 달리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물길(염하, 鹽河)이 빠르고,
또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인조 5년(1627) 후금(뒷날의 청)이 쳐들어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을 때 손돌(孫乭)이 길 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 따라 뒤짚힐 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갔다.
임금은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 전에 말했다.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을 따라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했다.
임금이 강화도에 발을 내딛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 험해졌다.
임금이 천천히 말했다.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지금 강화도의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덕포진(대곶면 신안리)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에는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
이를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한다.
江華戰蹟地 淨化記念碑(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 안에는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적인 요새지다.
역대를 통하여 전란 때에는 피란처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갯가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끼치지 않은 것이 없다.
고조선 이래로 조상들의 한 많은 유적 중에서도 굳이 민족의 피가 어린 전적지를 헤아려 보면
칠백 년 풍우가 스쳐 간 고려 때 궁궐 옛터, 고종 19년(서기 1232년)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송도로부터 강화로 옮겨 강도(江都)라 일컫고,
원종 11년(서기 1270년) 환도해 가기까지 무릇 39년 동안 항몽의 근거지가 되었었고
문화의 샘터였기에 우리는 여기를 잊지 못한다.
강화성은 이곳에 천도했던 고려의 도성이었고 중성을 쌓은 뒤 해안선 따라 외성을 쌓았으나
인조 14년(서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 성을 지키지 못해 온갖 치욕을 맛보았고
다시 그 뒤 고종 3년(병인, 서기 1866년)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갑곶진에 상륙을 개시하고
강화산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다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산포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퇴각했던 것이다.
5년이 지나 고종 8년(신미, 서기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통상을 표방하고 침입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들을 차례로 공격해 오자 우리는 최후까지 응전했으나
워낙 무력 불급으로 어재연 장군 등 수백 명 용사들이 순국했었다.
4년이 지나 고종 12년(을해, 서기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를 공격한 뒤
이듬해 병자년에 이른바 강화도 조약을 맺었으며, 그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것이니 강화도야말로 민족 시련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유서 깊은 역사적 옛터에 세월이 흘러 성곽은 허물어지고 집터에는 잡초만이 우거졌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강화의 전적지를 돌아보시고 여기는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호국의 기상을 이어받는 국민교육의 정신적 도장이 될 곳이라 정성 들여 복원 정화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므로 그 뜻을 받들어 문화공보부가 이 일을 마치니
이곳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발길을 멈추고서 가슴에 국난극복의 결의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1977년 10월 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다.
용두돈대(龍頭墩臺)
용두돈대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을 지키던 천연 요새(要塞)로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 겸 포대이다.
고종 8년(1871)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 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 부르게 되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치열한 포격전(砲擊戰)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전적지(江華戰蹟地) 정화 기념비를 세웠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 (덕성리) 강화 광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