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서성 왕희지 석상(書聖 王羲之 石像)

앵봉(鶯峰) 2022. 1. 30. 19:10

仁華門(인화문)

 

패루(牌樓)는 중국에서 큰 거리에 길을 가로질러 세우던 시설물로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과 경축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제2패루(인화문)는 어질고 밝은 빛이 퍼진다는 뜻으로

차이나타운의 번성을 기원하는 소망을 담고 있으며,

특이하게 황금색 용(龍)이 휘감고 있는 화려한 패루로 한중문화원 앞에 세워져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38 (항동 1가) 인천 한중문화관 앞

 
 
 
 

인천해관터(仁川海關址)

 

1883년 6월 16일 이곳에서 우리나라 관세업무가 처음 시작되었다.

조선 정부는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on Mollendorff)를 고용하여 관세업무를 총괄,

인천해관에는 영국인 스트리플링(A. B. Stripling)이 부임했다.

인천역 자리에 있던 임시부두에 가건물을 짓고 업무 시작,

항구 시설이 준공되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서성 왕희지(書聖 王羲之)

 

 

 

 

동진의 명문 귀족 왕희지(王羲之)

 

왕희지(307~365년)는 자는 일소(逸少)이며, 낭야(琅琊, 현 산동성 임기현) 출신으로

동진 원제(元帝, 司馬睿, 317~322년 재위)시기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 등의 관직을 지냈다.

우군장군을 지냈기 때문에 왕우군(王右軍)이라고 불렀다.

그의 부친인 왕광(王曠)은 회남태수(淮南太守)를 지냈고,

숙부인 왕도(王導)는 동진이 부흥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었다.

또 다른 숙부인 왕돈(王敦) 역시 군권을 장악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여,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한다(王與馬 共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진시대에 낭야 왕씨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진서 晉書 권98).

이렇듯 귀족 명문가 집안에서 출생한 왕희지는 관직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지만

동진의 귀족 사회에서 지도적 지위를 누렸으며,

특히 성품이 맑고 고아하며 기품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그의 서예의 필법은 다른 서예가들의 장점을 널리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독창적으로 발전을 시켜 예술적인 조예가 대단히 깊다.

초서, 행서, 해서의 실용적 서체를 예술적인 경지로 완성시켰으며,

시집《난정집서》의 서문인〈난정 아집 시서〉가 대표 걸작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 해서의〈악의론〉,〈황정경〉,〈동방삭화찬〉, 행서의〈난정서〉,〈집자성교서〉,

초서의〈십칠첩〉,〈상란첩〉,〈공시 중첩〉등이 있다.

 

 
 
 

書聖 王羲之(서성 왕희지)

中國 山東(중국 산동)

臨沂市 蘭山區 人民政府 贈(임기시 난산구 인민정부 증)

2005년 봄 기증

 
 
 
 

1883 개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