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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 화교 강혜림(姜惠霖, 장후이린)의 묘

앵봉(鶯峰) 2022. 7. 16. 04:09

從軍 華僑 姜惠霖之墓(종군 화교 강혜림지묘)

 

신분 : 종군자

소속 : 1사단 15연대

사망일자 : 1951. 2. 2.

안장일자 : 1964. 12. 12.

묘역 : 국립서울현충원 12-1-null

 
 
 
 

종군화교 장후이린(姜惠霖, 강혜림)의 묘

 

산둥(山東)성 치샤(栖霞)현 출신의 강혜림(장후이린)은

중국 국민당의 국부군(國府軍) 부대원으로

중국 공산당의 홍군(紅軍)과 전투를 치른 경험을 지녔다.

평양에 거주하며 중화요리 음식점을 운영하던 중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자 1950년 11월 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육군 제1보병사단 15연대에 배속돼 적군의 동향 수색과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맡았는데,

그가 속한 부대를 중국인 특별 수색대라고 불렀다.

1951년 1월 말 국군 15연대는 서울 재탈환을 목표로

경기도 안성에서 과천까지 밀고 올라갔다.

중공군은 관악산 주요 봉우리에 진지를 구축해놓아 돌파가 쉽지 않았다.

강혜림은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했다.

적의 진지 8곳을 격파하는 그의 눈부신 활약 속에 국군은 관악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혜림은 실탄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적군의 총탄을 맞고 27세의 나이로 1951년 2월 2일 숨졌다.

그의 유해는 동지들에 의해 부산 화교소학교에 임시 안치됐다가

정부가 주한 자유중국(대만) 대사관과 화교 전우들로부터

군묘지에 안장하여 줄 것을 요청받고

정부에서는 1964. 11. 13. 제110회 국무회의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을 의결,

1964년 12월 12일 국립묘지 제24묘역에 안장했다.

외국인으로서는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이 처음이며,

생전의 공적으로 1959. 6. 1. 은성화랑무공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화교의 사기와 우방국과의 유대강화를 위하여 우리 전몰용사와 같은 대우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內

 
 
 
 

姜惠霖烈士墓園修建 紀念(강혜림열사묘원수건 기념)

韓國漢城華僑靑年反共救國會 謹立(한국한성화교청년반공구국회 근립)

中華民國 六年 三月 二十九日(중화민국 6년 3월 29일)

 
 
 
 

惠霖烈士千古(혜림열사천고)

義魄長存(의백장존, 의로운 넋은 오래도록 남는다)

黃杰敬題(황걸경제)

 

 
 
 

강혜림 의사는 1925년 10월 25일 중화민국 산동성 서하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어버이를 따라 한국 북녘땅 평양에 거주하게 되었다.

1950년 겨울 북녘땅이 수복되자 그는 공산당의 폭정에 격분하여

한국 육군 제1사단 15연대 중국 수색대에 종군하여 반공 투쟁에 이바지했다.

그해 1950년 11월 1일 전투에서 성질이 강직하고 용감한 그는 솔선하여

적진을 종횡무진하게 돌격하여 수차 큰 공을 세워

부부대장으로 승진하였고 무공 화랑훈장을 받았다.

1951년 2월 2일 그는 경기도 과천전투에서 불행히도

적탄에 맞아 쓸어져 장열하게 희생하였으니

그때 강의사의 나이는 불과 27세 꽃피는 청춘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참작 국립묘지에 그를 모셨다.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안 했고 또한 중, 한 양국의

반공사상의 미담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도 반공 대륙으로 잃어버린 땀을 되찾을 때

구천에 있는 그의 영혼도 웃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