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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대첩의 명장...충무공 김시민 장군(忠武公 金時敏 將軍)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09. 5. 15. 21:16

        진주대첩의 명장... 충무공 김시민 장군(忠武公 金時敏 將軍)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晉州大捷)쓰고 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 천안 병천에서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157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 군기사(軍器寺) 판관(判官)을 거쳐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목사(牧使)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제를 갖추어 사천, 고성, 진해, 지례, 금산(金山) 등지에서 승전고(勝戰鼓)를 울리며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5일 침공한 적의 2만 대군을 불과 3,800 여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여 눈물짓다가 39세를 일기로 이 곳 진주성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슬프다! 장군의 천수(天壽)가 꺾이지 않았던들 이듬 해(癸巳) 6월 진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을까.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록된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이에 만 사람의 뜻을 모아 장군상을 세움은 나라와 겨레를 있게 한 그 매운 충절을 만세에 전해 우러르고자 함이다.

       2000 년 1 월 1 일

       

      김시민장군은 1554년(명종 9년)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에서 지평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3세손이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즐겨 하였는데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장군은 25세때인 1578년(선조 11년)무과에 급제하였다. 급제후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으며, 1583년 이탕개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에는 진주판관이 되었다. 부임한지 1년후인 1592년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

       대행에 임명되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나가 왜군을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진주목사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제1차 진주성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무전투지역을 순시하던 중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치료받다가 며칠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을 높이사 선조 때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상락군에 추록하였으며,

       숙종때에는 정1품인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였으며 충무공 시호를 내렸다.

       또한 장군을 모신 진주 충민사가 고종 5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장군의 신위를 진주 창렬사에 함께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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