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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사랑, 겨례사랑 "백범 김구 선생(白凡 金九 先生)"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1. 5. 19. 05:59

     민족사랑, 겨례사랑 "백범 김구 선생(白凡 金九 先生)"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1949년 6월 26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종교인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니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틱통치 반대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협상을 주도하였다.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직후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되면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한 개신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배드로이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이다.

     

    (충북 음성,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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