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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건 신부 상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1. 7. 8. 05:56

     김대건 신부 상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님자를 아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염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 오,육십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

    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주벌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 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야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 이십 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야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을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야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여 사랑을 친구하노라.    - 부감 김 안드레아

     <추신>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이오, 막비주상주벌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바니

    너희 감수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야 너희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러 말고 큰 사랑을 일워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있거라.


    김 신부 사정 정표

     

    (경기도 안성 미리내 성지에서...) 

     

     

     

     

     

     

    김대건 성인 연보
     
         1821.8.21 충청도 솔뫼(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출생.
    1836.4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생 후보로 선발.
         1836.12.3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12.28 조선입국을 위해 요동에 머루르고 있던 샤스탕(Chastant,鄭)신부 댁에 도착.
         1837.6.7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대표;Libois신부)에서

    칼레리(M.C allery)신부 등에게서 수학.
         1837.8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1838년 겨울 귀환)
         1841.11.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다시 마닐라로 피신(11월에 귀환)
         1841.11.  최양업과 함께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1842.2.15 메스트를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세실 함장의 에리곤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10.26 요동의 백가점(白家店)도착. 최양업,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감.
             12.27 조선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 상봉.
             12.29 변문 출발. 의주를 통해 조선에 귀국(1차 귀국)
             12,31 압록강을 다시 건너 중국측 변문으로 감.
         1843.3.   변문으로 나가 조선교우와 접촉한 뒤 백가점으로 귀환(2차 탐색)
              1843.4.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
         1844.2.4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 입국로 탐색을 우해 훈춘으로 출발(4차 탐색)
              3,8  훈춘을 거쳐 조선에 귀국(2차 입국), 경원에서 조선 교우 상봉.
         1845.1.1  조선교우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3차 입국)
              1.15 서울 도착. 돌우물골(석정동)에 유숙.
              4.30 선교사 영입을 위해 현석문(가를로)등 11명의 조선인
                   교우들과 함께 제물포 출발(6,4 상해 도착)
              8.17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8.24 상해에서 약 30리 되는 만당 성당에서 첫 미사.
              8.31 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Raphael)호를  타고 상해 출발.
             10.12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1846.5.14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자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주교의 지시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
               6.5 체포됨.
               6.9 해주 감영으로 압송.
              6,21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8,29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회유문 작성.
              9.15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음.
              9,16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0.26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됨.
         1857.9.23 가경자로 선포됨.
         1901.5.18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이장.
         1925.7.5  시복됨.
         1949.11.15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 로마 교황청에서 7
                    월 5일을 김대건 신부 축일로 정함.
         1960. 7. 5 시복됨.
         1984. 5. 6 시성됨.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
     
         동방의 나라 조선에 구원의 빛이 동터 올 때까지는 진리를 갈망하는 선각자들의 연구와 빛을 찾아 나서는 열성으로

    선교사 없이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은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씨앗이 자라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고 수없는 난관이 있었다.

    조선은 당시 양반과 상민의 계급사회였고 주자가례를 실천 철학으로 삼는 시대였으므로

    천주교의 새로운 교리는 기존 사회 제도를 위협하는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창립 초기부터 이어지는 박해의 회오리 바람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전 국토를 혈제의 제단이 되게 했다.
         그러나 천주를 향한 믿음의 불꽃은 신앙 고백을 통해 곳곳에서 찬란한 빛으로 드러났고,

    하느님의 자비는 초기 순교자들의 피로써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실 섭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 가문에서 태어난 대건의 아명은 재복이었고 세례명은 안드레아였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김데레사 성녀는 택현의 딸이요, 대건의 당고모였다.

    일찌기 '내포의 사도'이존창 에게 복음을 전해 들은 증조부는 열심한 신앙생활로 신해박해(1791)때 처음 체포되면서

    수없이 옥문을 드나들었고 기약 없는 옥살이 끝에 해미에서 1816년 옥사함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가장인 김진후의 순교로 아들들은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다.

    김대건의 조부 택현은 1827년 정해 교난의 박해를 계기로 낯선 타향인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해서 살게 되니

    이곳은 비록 험령대산은 아니어도 첩첩산중이어서 그간의 박해를 피해 몰래 이주해 온 교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대건의 나이 7세 때였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골배마실로 이주해 온 소년 김대건은 이 때부터 조부 택현의 지도로 한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김대건의 부친 제준 이냐시오는 열심한 신앙으로 교회 일에 열심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분이다.
         그러나 소년 대건에게 깊은 신심을 키워 준 데에는 모친 고 우르술라의 힘이 컸다.

    모범적인 신앙인 가정에서 자란 김대건이 첫영성체를 한것은 1836년 6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서였다.

    1836년 1월에 입국한 모방 나 신부는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마음을 쓰며

    각 방면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결심도 대견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놓는 부모의 결단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7월에 소년 김대건은 서울로 올라와 최방제와 최양업을 만났으며,

    마침내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세 소년도 함께 떠나게 되었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현석문,조신철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인 호송자와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 소년 신학생은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의 경리부 책임자인 리브와 신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마카오는 1557년 포르투갈이 점령한 이색적인 도시로서 그 당시 서양인의 극동 진출의 근거지가 되었다.

    김대건과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은 얼마 후 마카오에서 청국인들에 의한 민란을 겪게 되어
         외방전교회 회원들과 같이 수개월간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신학생으로 면학이 계속되었으나 곧 동료 신학생인 최방제가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고국산천 멀리 이역에서 동학도이자 동포를 잃은  김대건, 최양업 두 소년의 가슴은 얼마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그들은 슬픔과 낙담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일어난 민란으로 근교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머물면서 면학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때가 1839년 4월이었다.
         그해 11월에야 다시 마카오롤 돌아오게 된다. 이해는 조선에서는

    기해박해가 벌어져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는 수난의 해였고,

    신학생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도 이때 순교했다.
         마카오로 귀환한 후 철학 공부에 정진해 1841년에는 철학 과정을 수료하고 신학 과정으로 진급했다.

    그들이 전공한 것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철학과 신학이었으나 그것을 익히기 위해 그보다 하부구조를 이루는

    기초교양을 쌓는 서양 학문의 초.중등과정을 거쳐야 했다.
         또한 면학 장소가 마카오,마닐라 등 국제 도시여서 학식과 견문이 넓어지고 문화와 교양을 갖춘

    이른바 지식인으로 자란 신학생들은 쇄국 조선에서 벗어나 조선인 최초로 해박한 서구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두 신학생이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받고 있던 1840년, 프랑스의 루이 필립 황제는

    세 척의 군함을 극동 해역으로 파견해 청국과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군함의 사령관인 세실은 마카오에 기착해 파리외방전교회 지부를 찾아와 유익한 자문을 구하면서 보조자를 청했다.

    이리하여 김대건과 조선교구 소속의 메스트로신부는 에리곤호에 최양업과 만주교구의 브뤼니에르 신부는 파보리트호에 올랐다.
         서품을 기다리던 두 조선 신학생은 이렇게 귀국길에 오르는 꿈에 부풀었다.

    두 군함은 1842년 가을에 양자강 어구에 다다르게 되었으나 때마침 영국과 청국 사이에 남경조약이 맺어지고

    전란이 끝나게 되자 신부들과 신학생들을 그곳에 내려놓고 돌아가게 되었다.
         김대건의 조선 입국 시도는 이때부터 무수한 장벽과 고난의 길의 연속이었다.
         조선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메스트로 신부와 김대건은 거지행세를 하고 입국의 길을 찾았으나

    외국인의 입국이 무모한 계획이라 판단되어 김대건만을 보내기로 하고 1842년 12월 23일 두 명의 중국인 교우와 함께 변문으로 향한다.

    변문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서 북경으로 가는 300명 가량의 동지사 일행과 만나게 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조선교회가 보낸 밀사 김 프란치스코였다.
         이때 그는 품속에서 앵베르 범 주교가 잡히기 전날까지 기록한  순교행적과 모방,

    샤스탕 신부의 마지막 편지와 다시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조선 교우들의 탄원서를 대건에게 내어주었다.
         7년만에 만난 고국의 교우와 헤어져 홀로 변문으로 들어가 다음 날 의주를 향해 길을 떠난 김대건은 중국인 교우에게

    김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문서를 메스트로 신부에게 보내주길 부탁하고 130 리 길을 하루에 걸어 멀리 의주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수없이 겪고 관문을 통과해 조국땅을 달리던 김대건은 추위에 못이겨 주막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그의 얼굴과 중국신 등을 수상히 여겨 첩자나 도망치는 죄인으로 보고 고발하겠다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체포될 것 같아 김대건은 다시 의주로 발길을 돌렸다. 굳센 김대건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지쳐서 눈 속에 쓰러져 잠들었다.
         이때 어디선지 "일어나 걸어라"하는 소리가 들리고,그림자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보였다.

    훗날 김대건은  이 일을 천주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43년 1월 6일에는 메스트로 이 신부가 있는 백가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43년 1월 백가점으로 돌아온 김대건은 그곳에 머무르면서 입국 길을 트기 위해 팔방으로 노력했다.
         훈춘을 거쳐 함경도 경원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거기서 서울까지 무사히 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이 계획을 일단 포기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서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소정의 공부를 끝냈으나 만 25세가 되지 않아 신품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부제품을 받게 된 것이다.
         1845년 1월 초 의주쪽으로 해서 몰래 김대건 혼자 입국하니, 참으로 10년 만에 대하는 고국산천이었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보고하고 주교를 맞아들여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서울 돌우물골에 작은 짐을 풀고 꼭 만나야 하는 교우들만 접촉하면서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열병을 몹시 앓았다.
         하느님의 보호로 건강이 회복되자 준비해 온 150냥으로 배 한척을 사서 성직자를 맞을 채비를 했다.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기해박해 때 남편이 순교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유리걸식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어머니를 찾아 뵈올 엄두도 못내니 김대건은 현석문 등 11명의 교우들과 그해 4월에 상해쪽을 향해 배를 띄웠다.
         교우들 중에는 배를 타 본 일조차 없던 6명의 농부도 있었다.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 밤낮없이 시달리어

    김대건은 끌고가던 종선과 두 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김대건 역시 심하게 배멀리미에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하고 안심을 시켰다.
         이렇게 일행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산동 배가 가까이에서 그대로 지나가려는 것을

    김대건이 옷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구조를 청해 상해까지 배를 끌고 가 주기로 결정받았다.
         김대건 부제 일행이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를 기다리고 있을때 주교는 마카오에 있었다.

    반가운 소식을 접한 고 주교는 다블뤼 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로 와서 김대건을 반갑게 만났다.

    선 입국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고 주교는 서둘러 김대건 부제에게 서품식을 올릴 차비를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쯤 떨어져 있는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열 명도 안되는

    조국 동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건은 페레올 고 주교 집전하에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달 24일 주일에는 만당 소신학교에서 안 다블뤼 신부가 복사하는 가운데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의 수선탁덕 김대건 신부는 곧 교우들이 수리하고 있는 배로 돌아가서 조선으로 돌아갈 즐거움을 그들과 나누고 있었다.

    그해 8월 31일에 고 주교와 안 신부가 남모르게 그 배로 찾아와 고 주교는 길이가 25척이고

    폭이 9척이며 깊이가 7척밖에 안되던 그 작은 배에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김대건 신부,안 신부,

    선교우들은 그 밤으로 조선을 향해 바닷길을 떠나게 되었다.
         라파엘호는 처음에는 다행히 요동 방면으로 가는 중국 교우의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게 되어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서 더 이상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물결이 치는 대로 배를 맡기고 있자난 풍파가 차차 가라  않게 되었다.
         새로 키와 돛대를 마련해 동쪽으로 뱃머리를 향했다. 라파엘호는  호수천신의 인도를 받아 9

    월 28일에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되니,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을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리 나바위라는 조그만 교우촌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과 꿈에도 조선입국을 그리워하며 6년을 준비한 고 주교의 기쁨은 어떠했으랴!
         이들은 곧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을 틈타 상륙하게 되었으니

    1845년 10월 12일이었고, 상해를 떠난 지 42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바위에서 하룻밤을 지낸 김대건 신부는 다음날 서둘러 떠났다.
         고 주교와 안 신부는 그곳에 남아서 우리말을 배우며 성무를 집행하게 되었는데

    나바위 교우들은 두 성직자를 맞아 날 듯이 기뻐했다.

    천주의 은총으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미사 참례를 날마다 하게 되고 주교와 신부를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는 용기백배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언어와 활동에 제약이 없는 방인 성직자이기에

    전국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영신을 위로하고 전교에 힘쓰며 성무에 충실했다.
         다시없이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방인 성직자였기에 페레올 주교

    마침내 불고 25세의 청년 사제 김대건 신부를 조선교구 부감목으로 선임했다.

    김대건 신부는 먼저 고 주교가 안전하게 있을 곳을 마련해 서울로 오게 하고

    자신은 고향으로 내려가 교우들을 돌보고 꿈에도 잊을 수 없던 어머니를 찾았다.
         10년 동안 외국을 다니다가 신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는 가슴이 메어지느 듯한 벅찬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를 위한 미사를 드리면서 순교하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목숨도

    이미 천주께 바친 몸이며 한 어버이의 아들이기 전에 모든 교우의 아버지가 된 책임을 크게 느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아직 입국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메스트로 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본국에서 오는 연락을 초조하게 고대하고 있었다.

    고 주교의 밀명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마포 나루를 떠났다.

    1846년 4월, 교우 임성룡의 배를 타고 연평도 앞바다를 지나 등산곶에 이르렀다.

    침내 백령도 부근에서 그물을 치고 조기잡이하는 중국어선을 만나 중국말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눈치를 보았다.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준비해 간 편지와 지도를 요동반도와 마카오의 연락장소로 전해 주도록 부탁했다.

    김대건 신부는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매우 기뻐하면서 배를 돌려 돌아가자고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등산곶 일대를 감시하는 군교들이 중국어선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빌려 달라고 쫓아 왔다.

    당시의 국법으로 양반 소유물을 정부에서 징발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김대건 신부는 자기 배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여기서 시비가 벌어져 김대건 신부는 폭행을 당하고 옹진 감옥으로 연행돼 갔다. 1846년 음력 5월 12일 밤의 일이었다.
     
        최양업 부제와 이 메스트로 신부 영입을 위해 위험으 무릅쓰고 연평도 조기잡이 배에 접근해

    편지와 지도를 전하고 기뻐하던 김 대건 신부는 체포됐다.

    순위도의 부산진으로 연행된 김대건 신부는 옹진, 해주 감옥을 거쳐 마침내 서울로 압송되었다.
         엄중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취조 과정에서 일찍이 천주교를 위해 해외로 파견된 샌학생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갖춘 깊은 학식과 해박한 세계 지식은 박해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박해자들의 요청으로 예쁘게 채색한 영어로 된 두 장의 세계 지도를 그려 올렸다.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여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은 학식과 견문은 놀라운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신분과 경력, 그리고 학식이 유별남에 놀란 정부당국은 40여 차례나 심문했고

    국왕을 모신 어전회의를 열어 거듭 논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때 8월 9일 프랑스 함대가 홍주 앞바다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나 시부,

    샤스탕 신부의 문제를 가지고 문책 소동을 벌이며 국교를 열 것을 요구해 왔다.
         일찍이 청국에서의 아편전쟁 소식을 통하여 서구 식민주의 국가의 침략행위를 알고 있던

    조선정부는 당황해 하며 김대건을 활용할 방도를 강구하려 했다.
         그를 프랑스 함대에 보내 전날 세 선교사를 죽이게 된 것에 대한 해명과 함께 앞으로의 화의를 제의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김대건도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며 8월 10일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조정은 다시 강경한 쇄국정치를 주장하면서 김대건 새신부를 통외(通外)의 위험분자로 몰아서

    마침내 최후의 단안을 내려 군문효수형을 내린다.

    1846년 9월 16일 한국의 수선탁덕 김 대건은  한강물 굽이쳐 흐르는 서울 성밖 새남터에서

    휘광이가 내려치는 칼날 아래 참수치명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을 증거하기위해 굽힐 줄 모르는 김대건 신부는 처형을 받기에 앞서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한 것이니 내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주교를 믿으시오"라고 믿음과 신념에 찬 말을 외치고 의연하게 순교의 피를 흘렸다.
     
         수선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비록 서품을 받은 지 1년이라

    짧은 기간 동안 성무집행을 했으나 그의 생은 참으로 굵직한 삶이었다.
         동북 아시아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그의 활동과 국위 구령과 개화를 위해 헌신한

    참 삶의 실천은 종교적으로 한국인 성직자 특유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페레올 고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잃은 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젊은 조선인 신부를  잃은 것은 조선교회에 거의 갚기 어려운 불행입니다.

    나는 아비가 그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오직 그의 천국에서의 행복을 생각해서 그를 잃은 슬픔을 겨우 스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포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제 성직에 오른 분으로 그것도 오늘까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놀란 만한 웅변의 사람으로 한 번만이라도

    그와 접촉한 교우는 곧 존경과 사랑을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김대건 신부의 이러한 영광된 순교는 조선교회의 영원불멸할 명예이며 완전한 승리와 불멸의 약속의 보증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한 지 11년 후인 1857년 9월 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 칭호를 받게 되고,

    1925년 7월 5일에는 북자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49년 11월 15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를 받들게 되고,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하게 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김대건 사제 순교자를 그 첫 자리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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