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명분없는 물품은 하사품이라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속에서/나라사랑 2013. 4. 8. 20:31

     

    명분없는 물품은 하사품이라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리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등 3대에 걸쳐 4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영의정 등 정승으로 지냈지만, 그의 초가집은 비가 새고 누추해

    인조에게서 집을 하사받을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재상으로서 임금에게 집을 하사받은 이는

    세종 대의 황희, 인조 대의 이원익, 숙종 대의 허목뿐이다.

    이원익의 업적과 삶을 보면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질 수밖에 없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초유의 전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쌀 한 톨, 나무 한 그루 헛되이 사용하지 않아

    조선 최고의 청백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원익은 왕실의 후손이고 다섯 번이나 재상을 지낼 만큼

    조선 최고의 지도층이었으나 한결같이 청렴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이런 소문이 계속 나돌자 인조는 이원익에게 비단과 비단 이불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저는 이것을 받을 명분이 없습니다.

    명분 없는 물품은 누가 내려주어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인조는 자신이 하사한 물건이 되돌아오자 놀라 혀를 내두르며 탄복했다.

    1623년 정월, 인조는 승지 강홍중을 보내 이원익의 사는 모습을 다시 살피게 했다.

    돌아온 승지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합니다”

    당시는 인조반정으로 공신이 된 사람들이 권세와 부를 독점하던 시대였기에

    이원익의 자세는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재상이 되고 40년인데 그렇게 사는 정승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 삼아 본받을 바이다.”

    인조는 칭찬을 넘어 이원익에게 여생의 평안을 주기 위해

    관감당(현재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소재)을 하사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거절했다.

    “신을 위해서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원익이 인조가 하사한 집을 네 번이나 사양해,

    오가며 왕명을 전한 이가 탄복했다고 전한다.

    인조가 계속해서 강권하자 이원익은 마지못해 하사한 집을 받아들여 살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집에 살면서도 돗자리를 직접 짜서 생계를 해결했다.

    다른 정승들이 관직에서 물러나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긴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생애를 보냈던 것이다.

    = 조선참모실록에서 발췌, 박기현 지음, 역사의 아침 발간 =

     


    이원익(李元翼)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우리나라 대표적인 청백리이다.

    선조 때 대동법을 건의해 실시했고,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시정했다.

    안주목사 때 군병방수제도를 개혁하여 1년에 3개월의 복무를 2개월로 단축해서 법제화시켰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남인에 속했지만 성격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다.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 속 오리집(續 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