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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관아지(楊州官衙址) - 경기도 기념물 제167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6. 13. 04:14

     

    측우대

     

    내아영역(內衙領域)

     

    내아영역은 지방수령이었던 양주목사의 가족들이 거처하였던

    내아와 행랑채, 내아 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아건축 구조상 내아영역은 동헌의 서편에 위치하며, 내동헌 또는 서헌이라고도 불린다.

    튼 "ㅁ"자 모양의 내아에서 양주목사와 그 가족들이 거처하였고,

    양주목사 및 그 가족들이 내아와 동헌 사이의 협문인 중렴성문을 통해

    내아와 동헌을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아 아래쪽에는 행랑채가 있어 주로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기거하거나 창고로 이용되었다.

    또한 외부로의 출입을 위해 내아 삼문을 두었다.

    내아영역은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인들의 주내면사무소로 사용되었고,

    내야 전면부 쪽은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당시 죄인이나 포로를 가두고

    고문하는 장소로 이용되는 등 후대에 이르러 건물들이 망실되었다.

    3차 발굴조사 결과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아에 대한 복원 계획이 본격적으로 수립될 수 있었다.

    현재는 내아와 내아 삼문은 복원된 상태이며, 행랑채의 경우 건물지를 정비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한 내아 좌측에 양주 관아의 원활한 관리를 위해 별도로 관리사를 신설하였다.

     

     

     

    양주관아지(楊州官衙址) - 경기도 기념물 제167호

     

    양주관아지는 1506년(중종 1년) 현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의정부시 의정부1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 동안 양주목(楊州牧)을 다스리던 관청이 있었던 곳으로

    2000년부터 2017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및 담장지, 배수시설, 출입시설 등의 유구와 평기와, 막새기와,

    명문 기와 등의 기와류 및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자기류, 상평통보 등 금속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양주 관아의 규모가 어떠하였는지는 여지도서(輿地圖書, 1760년), 경기지(京畿誌, 1842년),

    경기읍지(京畿邑誌, 1871년)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중 양주목의 규모를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경기읍지로,

    약 31개의 관아 시설에 그 규모는 326여 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주시는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梅鶴堂, 매학당)의 복원을 시작으로

    그간의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하여 동헌부 부속건물 및 내아에 대한 복원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2017년 동헌부 부속건물인 동행각, 서행각, 내삼문, 사령청, 외삼문, 중렴성문,

    외렴성문과 양주목사의 관사였던 내아, 내아삼문에 대한 복원을 완료할 수 있었다.

    또한 문화재 보호구역 내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무형문화재 통합공연장, 주차장,

    양주관아지 관리센터를 조성하여 양주 관아를 찾는 관람객들의 관람 편의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매학당 동쪽으로는 18기의 양주목사 송덕비군(楊州牧使 頌德碑群)이 위치하고 있으며,

    매학당 뒤편으로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양주관아에 행차하여 활을 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어사대비(御射臺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가 자리하고 있다.

    매학당 동쪽 뒤편으로는 '금화정(金華亭)'이라는 정자가 위치하고 있는데

    양주목사가 백성들을 사랑하여 함께 즐겼다는 '관민 동락(官民同樂)'의 사상이 배어 있는 장소이며

    그 글씨가 정자 아래쪽 바위에 새겨져 있다. 1996년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다.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 1399번길 15 (유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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