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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東學農民革命記念公園)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0. 7. 17. 04:47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를 계획

     

    1894년 8월 2일 보은 사각면(현 탄부면 고승리) 냇가에는

    동학도 수백명이 하늘을 뚫는 의기로 집결했다.

    보은군수 정인량이 집결지를 찾아오자 산골짜기 집회장소로 안내한 동학인들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관민이 함께 창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지 10일만에 보은에서 처음으로 의병봉기에 나선 것이다.

    이와 같은 계획은 동학 두령인 임규호. 황하일. 이관영. 김재현이 주도하였다.

    동학의 대도소가 위치했던 보은은 대규모 무장봉기를 결정한 뒤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의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모여드는 충성의 무대로 떠오른다.

    보은은 국가가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앞장선 외로운 지역이었다.

    아 우리는 보은의 의지를 깊이 새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

     

     

    전쟁의 참화에 시달린 백성들

     

    충청도 · 경기도 · 평안도는 청일전쟁 무대로 변해 도시가 파괴되고

    마을이 불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충청도 아산에 들이닥쳐서 곳곳을 방화하고

    관청과 마을에 들어가 인명을 해치며 돈과 곡식을 빼앗아갔다.

    또한 평양 주변의 마을들은 백성들이 전란을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여 폐허로 변했다.

    힘없는 나라 백성들은 외국군대가 서로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참혹한 시기를 겪어야 했다.

     

     

    청일전쟁 발발

     

    7월 25일 오전 7시 아산만 풍도 부근에서 일본 함대가 선전포고 없이

    청의 군함에 함포사격을 가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성환전투, 9월 16일에는 평양전투를 벌려졌고,

    9월 17일에는 압록강 어구에서 황해해전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요동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등장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국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하는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과 더불어

    대륙을 침략하는 정책을 펴기시작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서

    국가의 독립을 보존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1894년 7월 23일 새벽 4시 일본군의 기습 공경을 받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점거당하였다.

    경복궁 수비병은 무장해제 되었고 백성들을 다투어 도성 밖으로 피신하는 등 민심이 흉흉하였다.

    국왕은 궁궐 안에 유페되기에 이르렀고,

    조정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낼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커다란 혼란을 겪었다.

    일본은 친일개화파를 내새워 정권을 장악하고 갑오개혁의 추진과정에 간섭하면서 국정을 농단하였다.

    나라 전체가 크나큰 위기에 적면하게 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위령탑

     

    꼭 지켜야 할 동학의 덕목

     

    첫째, 집안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 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우마육축을 확대하지 말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노할 것이다.

    둘째. 하루 세 끼 식사 때 한울님께 심고하라. 청결한 물을 길러 음식을 청결하게 하라.

    셋째,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라. 흐린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가래침이나 콧물을 아무 데에나 토하지 말라.

    만일 길이거든 반드시 물어라. 그렇게 하면 하울님이 감응하실 것이다.

    넷째, 모든 사람을 한울님으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시거든 한울님이 오셨다 하라.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

     

     

     

    동학혁명군 12개조 폐정개혁안

     

    ① 각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③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⑤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씌우는 평양립(平壤笠)을 벗게 할 것
    ⑦ 청춘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⑧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⑨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
    ⑩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무엇하러 나왔느냐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날라왔지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아버지의 넋새보오 엄마죽은 넋새외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東學農民革命記念公園)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는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주무대였다.

    이중 충청도 보은지역이 차지하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의 자취는 역사적인 커다란 분수령이 되고 있다.

    현재 보은읍에서 상주방면으로 자동차로 10여분 달리다 보면 장안면 장안리가 나온다.

    보습산 골짜기의 줄기가 수풀림(林)자 모양새로 굽이쳐 흘러 마을을 끌어안고 있는 형세인

    이곳 장안리는 1893년 3월 수만명의 동학농민군이 반봉건, 반외세을 외치며 창의하여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선사가 산간벽지로 쫓겨 다니면서 포교활동 할 때부터

    동학의 중심지였으며 1892년 대도소가 장내리에 설치되면서 동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1893년 3월 적게는 2만, 많게는 7만여 명의 동학교도가 이 마을 앞 천변에 모여

    교조 신원과 척외 양창의를 내걸고 시위를 하여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그해 3월 동학 보은집회 때에는 하도 많은 인파가 모여

    "서울 장안이 장안인가 보은 장안이 장안이지"라는 민요가 생길 정도로

    많은 동학교도가 모였다고 한다.

    당시 장안에 집결한 대규모 교도을 관리하기 위해 포 단위의 조직을 제도화하여 정해진 포명과

    대접주 50명에 이르렀으나 이날 모인 동학교도의 수를 다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이에 따라 ‘취어’에는 각처에서 보은 집회에 오는 사람을 날짜별로 지역을 밝힌채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엄청난 동학교도의 집결에 당시 고종은 어윤중양호도어사를 보내 해산을 종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해산 의지에 동학교단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판단에 자진해산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교주 최시형은 노약자를 먼저 물러가게 하고 젊은 교도는 남아서

    정부에 봉연의 뜻을 항변하였으나 결국 20여일간 머물렀던 동학 교도들도 4월 2일부터

    장안마을을 떠나 고향으로 출발하였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방면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안마을 집회가 해산되었고 교주 및 고위 간부들은 청산 갯밭과

    보은 장안을 오가며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락하며 활동을 해 나갔던 것이다.

    보은동학농민혁명 공원이 조성된 북실마을 일대는 1894년12월 17일, 18일 양일간

    일본군에 의해 2,500명의 동학군이 사살된 역사의 현장이다.

    북실전투와 관련해 가장 뚜렷한 유적은 동학의 지도부가 집결했던

    김소천가와 종곡리 다라니 마을 뒷산에 있는 석축유적이 있으며,

    최후을 마감한 집단 매장지가 북실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다라니 뒷산의 석축 보루는 동학군 최후의 보루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밝히고 복원 안을 마련하여 안내판을 설치해 역사의 흔적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에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조성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보은지역의 대표적인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다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산16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동학농민군들은 인간평등의 실현, 사회비리 척결, 외국 침략세력의 배척이라는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봉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은 수백년간 이어오던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혁명을 좌절시킨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이후 계속되는 일제침략에 맞서는 항일 독립정신을 길러 주었습니다.

    또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왕과 관료들이 불러들인 청나라 군대와

    이를 따라 들어 온 일본군은 우리나라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적 상황을 참다 못한 우리의 유생과 백성들은

    동학을 통해 이 땅에 자주권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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