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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환기 고택(金煥基 古宅) - 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4. 30. 20:18

    신안 김환기 가옥

     

     

    화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955는 김환기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그 역사성을 기념하여 여기에 표석을 세운다.

    문화체육부 / ‘95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

     

     

    신안 김환기 고택(新安 金煥基 古宅) - 국가 민속문화재 제251호

     

    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로 우리나라 전통미를 현대화시키는데 주력한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 화백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 안채와 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환기는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제1세대 화가로 한국의 고전적 소재를

    추상적 조형언어로 양식화하여 한국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이곳은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던 공간이다.

    김환기 고택의 안채는 ㄱ자형 기와집으로 평면구성은 좌측으로부터

    곳간, 건넌방, 대청마루, 안방, 정지 순으로 꾸며져 있고

    정지 앞쪽으로 꺾어져서 다시 방 1칸이 드려져 있다.

    다듬은 방형(方形) 초석 위에 방주(方柱, 네모 기둥)를 세운 납도리식 형식이며

    정지의 판장문만을 제외하고 모두 띠살문이다.

    화실은 ㅡ자형 납도리 집이다.

    두 건물은 전통가옥이 근대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실용적으로 변용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환기의 부친이 이 집을 지었는데, 백두산의 원목 홍솔을 이곳까지 운반하고

    서울에서 도편수를 데려와서 지을 정도로 아주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김환기길 38-1 (읍동리) 읍동마을

     

     

     

    김환기(金煥基, 1913~1974)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수화(樹話),

    전라남도 진도군 기좌면 읍동(현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태어났다.
    1931년 19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로 밀항하여 긴조(錦城)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1년 만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4월에 다시 도쿄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였고,

    전위를 표방하는 미술단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참여한다.

    후지타 츠구하루의 주도하에 길진섭, 김병기와 함께 활동하였다.

    여기서 같이 다니던 길진섭, 다시카미 다케나, 간노 유이코,

    후나코시 미에코와 함께 '백만회'를 조직했다.

    도쿄의 화랑에서 단체전 4번, 개인전 1번을 하고 1937년 연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 교수를 역임하고

    1952년에는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5 ~ 44살 동안 5번의 전시회를 하다가,

    1956년 44세의 나이에 파리에서 예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프랑스 파리와 니스 그리고 벨기에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프랑스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

    이후 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1959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다시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명예상을 수상했다.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뉴욕으로 건너가 11년간 록펠러 3세가 설립한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뉴욕에 정착한다.

    여기서 김환기의 대표작인 전면점화가 탄생하였다.

    그러던 중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그 유명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을 출품하고 대상을 받기도 했다.

    1974년 7월 7일에 뇌출혈로 갑작스레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지만.

    7월 25일 뉴욕주 포트 체스터(port chester)에 있는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평소에 즐겨 다니던 뉴욕주 발할라(Vahalla) 산마루의 켄시코(Kensico) 묘지에 안장되었다.

    조각가 한용진이 묘비를 세우고 서예가 김응현이 글씨를 썼다. 향년 62세.

     

    서울과 일본에서 공부를 했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이미지가 걸러진 절제된 조형성과 한국적 풍류,

    그리고 음악적 서정이 반영된 독특한 추상화풍으로 국내와 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한국회화의 정체성의 방향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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