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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智似愚 大勇似怯(대지사우 대용사겁) - 조성환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 21:11

    大智似愚 大勇似怯(대지사우 대용사겁)
    乙酉季秋(을유계추) 靑丘歸客(청구귀객) 曺成煥(조성환)

     

    큰 슬기는 어리석음 같고, 큰 용기는 무서워함과 흡사하다.

     

     

     

    大智似愚 大勇似怯
    乙酉季秋 靑丘歸客 曺成煥

     

     

     

    조성환(曺成煥, 1875~1948)

     

    187579일 경기도 여주군 보통리에서 조병희(曺秉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호는 청사(晴蓑)이며, 이명은 조욱(曺煜, 曺旭)이다.

    대대로 관직을 지낸 창녕조씨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출신으로 부친도 진사였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부패한 군부(軍部)를 숙청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칙명(勅命)으로 3년 만에 풀려났다.

    항일구국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1907년 1월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는 이상설(李相卨)을 도왔다.

    귀국한 뒤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으며, 신민회 북경 연락책임을 맡았다.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해 청도(靑島)에서 열린 신민회 회의에 참가해

    독립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1912년 7월 상하이[上海]에서 만들어진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으며,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보다 깊은 유대관계를 맺어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만주를 시찰하러 오자 처단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고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거제도에 1년간 유배된 뒤 풀려나자 다시 망명했다.

    1916년 9월 상하이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체화동락회를 조직해

    재외 한인단체와의 연락을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을 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해 교민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베이징[北京] 주재요원을 맡았다.

    그해 7월 다시 만주로 돌아와 서일(徐一)·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했다.

    청산리전투 후 일제의 강력한 보복작전이 전개되자 소만(蘇滿) 국경지대의 밀산(密山)으로 이동,

    만주 각지에서 모인 군사단체를 통일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로 선임되었다.

    자유시사변을 겪자 다시 만주로 돌아와, 1924년 3월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재정비하고 군사부장 겸 참모가 되어 무기 구입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독립군 양성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25년 북로군정서를 확대·개편하여 김좌진을 중심으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외교부위원장이 되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베이징에 주재했다.

    1926년 베이징에서 유일독립당 조직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10월 대한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를 조직하고,

    이어 상하이·광둥[廣東]·난징[南京] 등지에서 촉성회가 조직되자

    1927년 11월 베이징 대표로 상하이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관내 촉성회연합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좌익이 1929년 11월 상해촉성회 해체 선언을 함으로써 유일독립당운동은 실패했다.

    1931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기도위원으로 선임되고, 1934년 국무위원이 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좌·우익 연합전선을 추구하고자 1935년 7월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을 조직했으나

    투쟁방법론의 차이로 탈퇴했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이 되었다.

    1939년 치장[綦江]으로 옮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3개년 계획을 세우고

    독립운동 방략을 작성하자 군사관계를 담당했으며, 그해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중국 정부와 협의해 한국광복군 창설에 노력했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겨오자 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을 통합해

    한국독립당을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산하 최고 총수부의 일원이 되었으며,

    1945년 5월 임시의정원 군무·교통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8·15 해방을 맞이하자

    그해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대한독립총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주춧돌〉·〈대종교인과 독립운동〉 등이 있다.

    죽은 후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 (남화리)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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