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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화산릉행차(正祖大王 花山陵行次)...수원화성문화제수원사랑/문화예술(文化藝術) 2007. 10. 14. 04:20
정조대왕 화산릉행차 (正祖大王 花山陵行次)
제44회 수원화성문화제(水原華城文化祭)를 맞아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정조대왕의 화산릉행차 (花山陵行次)시연을
2007. 10. 13(토) 오후 수원시가지에서 펼쳐졌다.
정조대왕의 능행은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拜峰山)에서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왕의 궁밖 나들이를 ‘거둥’ 혹은 ‘행행(幸行)이라 하는데, 능(陵, 왕과 왕비의 무덤)에 가는 행행을 능행(陵幸),
원(園, 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행행을 원행(園幸)이라고 한다.
장헌세자는 왕이 아닌 세자의 신분이었으므로 정조대왕의 현륭원 방문은 원행에 해당한다.
국왕이 능원에 참배하기 위해 궁밖을 나가는 일은 모든 왕들의 관례로서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도 궁밖 나들이가 많은 임금이었다. 국왕의 능행이나 원행은 1년에 1회 혹은 2회가 보통이지만,
정조는 재위 24년간 66회의 행행을 하여 1년 평균 약 3회를 기록했고, 아버지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정조는 왜 이토록 행행을 많이 가졌을까?. 물론 그것은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왕이 행행 중에 한 일을 살펴보면, 행행의 목적이 효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행행 중에 3,355건의 상언(上言)이나 격쟁(擊錚)을 처리하였다.
그러니까 한 번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民怨)을 처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상언이란 백성들이 임금을 직접 만나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을 말하고,
격쟁(擊錚)은 행차 중에 징을 치고 나와서 왕에게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상언과 격쟁은 조선 후기 왕들이 모두 허용한 일이지만, 정조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만큼 정조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 했던 임금이었다.
이 사실은 정조의 화성행차가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 주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행차가 지나가는 시흥, 과천, 화성 일대 주민들의 민정을 직접 시찰하고, 민원을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행의 목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가 따랐다.
우선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려면 자연히 길을 닦고 다리를 건설 혹은 보수하게 되어 치도(治道)의 효과가 있었다.
또한,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가면서 수도권의 방위체제를 점검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이밖에도 왕은 현지에 가서 별시(別試)를 시행하여 지방의 인재들을 수시로 발탁하여 등용하였으며,
행차 중에 혹은 행차를 마치고 돌아와서 많은 신료와 군사들에게 상을 내려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므로 왕의 궁밖 나들이는 때로는 민폐를 끼치는 측면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지역사회 발전과 지방민의 사기진작에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정조의 궁밖 나들이 중에서도 1795년(정조19년)의 현륭원 방문은 각별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해가 을묘년(乙卯年)이므로 흔히 ‘을묘원행(乙卯園幸)’이라고 불리는 이 행차는 표면상으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나들이였다.
돌아가신 장헌세자의 구갑(舊甲)도 같은 해에 겹쳐서, 현륭원을 참배한 후
어머니 회갑을 화성에서 치르는 것은 명분이 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8일간의 화성행차에서 벌인 일련의 행사들은 단순한 회갑잔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화성에서 잔치를 벌인 뒤 6월 18일에 정식 회갑잔치를 서울의 연희당(延禧堂)에서
다시 치렀다는 것도 화성잔치의 정치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작게는 어머니의 한을 풀어 주는 효성의 표현이지만, 크게 보면 자신이 재위 20년간 쌓아 놓은 위업을 과시하고,
내외 신민(臣民)의 충성을 결집시켜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거대한 정치적 시위이기도 하였다.
화성을 무대로 하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친위세력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거창한 정치 드라마,
정조는 바로 그것을 겨냥한 것이다. 그래서 이 행사에 기울인 정조의 정성과 관심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조는 드디어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때와 장소와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 시위는 한양에 잠복된 구질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혼신의 도전이기도 하였다.
그 혼신의 도전적 드라마 속에는 왕조 문화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한국판 르네상스가 꽃피고 있었다.
정조대왕 화산릉행차(正祖大王 花山陵行次)
경기감사(京畿監司).... 경기지방의 관찰사(觀察使)
조선시대 시정(時政)의 기록을 담당한 춘추관의 정1품 관직. 총리대신(總理大臣)...
조선 후기 군국기밀(軍國機密)과 일반 정무를 총괄하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장관
마병별장(馬兵別將)....
훈련대장(訓鍊大將)
훈련대장 -서울 오부의 장정을 뽑아 무예를 훈련하던 훈련도감의 장
어보마 행렬 (御寶馬 行列)
어보마(御寶馬) .....
임금의 옥새와 옥보를 실은 말
능행을 관람하는 인파....
취타대(吹打隊)
정조대왕(正祖大王)
정가교(正嘉轎)...임금(정조대왕)이 타는 가마
수라가자(水刺駕子)....임금의 음식을 실은 가마
자궁가교(慈宮駕轎)....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가는 자궁가교(慈宮駕轎)와 정조대왕이 타고 가는 말 좌마(座馬)가 뒤따른다.
좌마 앞뒤에는 무장하지 않은 무예청 별감과 위내사령이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다
군주쌍교(郡主雙轎) ....정조대왕의 두 여동생인 청선군주와 청연군주
정궁(正宮)이 낳은 딸은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은 옹주(翁主) 인데,
세자의 딸은 군주(郡主)의 칭호를 내린다. 사도세자의 두 딸 – 정조의
누이동생 청연군주(淸衍郡主) 와 청선군주(淸璿郡主)의 가마가 나온다.
이 가마도 이날을 위하여 새로 만든 것으로 의궤에 자세한 내역이 나온다.
선기별장(善騎別將).... 장용영내의 마병부대장
장용대장(壯勇大將) .... 왕권강화를 위한 친위병의 장
병조판서(兵曹判書) .... 육조의 하나인 군무등을 맡았던 정2품 벼슬
취타대(吹打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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