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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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흉상(金大建 神父 胸像)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1. 7. 20:19
김대건 신부 흉상(金大建 神父 胸像)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명동성당은 가톨릭대 해부학 교실팀에 의뢰하여 성 김대건 신부의 유골을 바탕으로 성인의 얼굴을 복원하였다. 본 흉상은 김 신부의 얼굴 뼛조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뼈대를 제작한 뒤 19세기 당시 남성의 윤곽에 맞춰 찰흙을 붙여 청동 모형으로 제작한 것이다. 무덤 횡대(橫帶) 미리내 김대건 신부의 무덤을 덮었던 횡대 머리카락 김대건 신부 시신의 머리를 감쌌던 베와 그 베에 묻어난 머리카락 턱뼈 미리내 성요셉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 뼈 김대건 신부 유해 보존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처음 발굴된 이래 여러 곳으로 옮겨서 안치되고 분배되었다. 1846년 10월 26일 - 이민식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 1901년 5월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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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대박해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1. 11. 6. 20:13
한국 천주교회 대박해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송산리) 솔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관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순조(順祖)가 즉위되자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노론벽파(老論僻派)의 세력을 업고 천주교와 관련이 있는 시파(時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1801년 정월 10일(음)에는 공식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하여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하게 하고, 배교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신유박해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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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순교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1. 10. 16. 04:11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순교 1. 신앙 내력과 성장과정 소년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의 김해김씨 집안에서 성 김제준 이냐시오와 장흥 고씨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대건은 일찍부터 순교하신 증조부와 종조부 및 무혈 순교자인 집안 어른들의 신앙과 성덕을 배웠다. 7~10살경(1827~1830년경) 양친을 따라 서울 청파와 용인 한덕동을 거쳐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으며, 하느님을 찾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2. 신학생으로 선발된 소년 김대건 소년 김대건이 15살 되던 1986년 7월 용인 은이 공소에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3. 조선을 떠나는 세 신학생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18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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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도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1. 1. 18. 04:1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도 거룩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순교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 주시고 특별히 김대건 안드레아를 부르시어 머나먼 타국에서 사제로 축성하시고 마침내 순교의 영광을 주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진리의 근원이신 하느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처럼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굳게 믿으며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따랐던 순교의 삶을 본받아 저희가 어떠한 현세적인 어려움과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주님을 증언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희망의 근원이신 하느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고대하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세상의 유혹을 거슬러 용기를 내고 자비의 삶을 살아 저희가 다른 이들과 화해하고, 가난하고 힘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