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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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5. 28. 21:06
박석(薄石)의 차일(遮日) 고리 영녕전 박석에는 동그란 쇠고리(薄石고리)가 박혀 있다. 차일(遮日)을 칠 때 사용하였던 차일 고리로 햇빛이나 비를 가려 줄 천막을 치는 데 사용했다. 영녕전 악공청(永寧殿 樂工廳) 종묘제례 시에 주악(奏樂)하는 악사들이 대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사적,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지은 건물이다.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月臺, 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 주위에 담장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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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종묘 향대청 일원(宗廟 香大廳 一圓)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5. 24. 20:08
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는 개혁정치를 폈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하는 말 그림(駿馬圖, 준마도)도 사당 안에 있다. 조선왕조의 최고 사당인 종묘(宗廟)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중연지(中蓮池) 사적, 종묘 향대청 일원(宗廟 香大廳 一圓) 향대청은 제례에 바칠 향(香). 축문(祝文). 폐백(幣帛)을 보관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또한 제례에 종사하는 집사들의 집사청(執事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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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5. 21. 21:06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望廟樓) 동쪽에 있는 별당으로 고려 제31대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 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는 개혁정치를 폈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하는 말 그림(駿馬圖, 준마도)도 사당 안에 있다. 조선왕조의 최고 사당인 종묘(宗廟)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훈정동) 종묘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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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담장 각자(刻字)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0. 20:13
종묘 외대문(宗廟 外大門)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종묘 하마비(宗廟 下馬碑)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아 누구나 이곳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명(命)이 적힌 비석(碑石)이다. 기록에 의하면 태종 13년(1413) 2월에 처음으로 예조(禮曹)의 건의에 의하여 종묘와 궐문 앞에 설치하였던 것이 하마비(下馬碑)의 시원(始原)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제작되었으나, 현종(顯宗) 4년(1663)에 종묘전교(宗廟前橋)를 개수하면서 석비(石碑)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하마비의 전면에 새겨진 내용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하마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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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종묘 어정(宗廟 御井)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3. 30. 21:08
종묘 외대문(宗廟 外大門)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하는데, 여느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검소하고 단순하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종묘 어정(宗廟 御井) 종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 앞에 보존되어 있는 우물이며, 조선 역대 왕들이 종묘에 왕래할 때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하여 '종묘 어정'이라고 불리었다. 이 우물의 규모는 지름이 1.5m, 깊이가 8m 내외이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우물을 콘크리트 관을 묻어 이용하였고 1983년 11월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우물로서 기능은 하지 못하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였으며, 여름에는 물이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김이 오를 만큼 따스하였으며, 물맛도 좋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