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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향연을 열었던 곳...죽서루(竹西樓)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09. 2. 17. 03:50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향연을 열었던 곳...죽서루(竹西樓)
이 누각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인거사집(動安居士集)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에 이승휴(李承休)가 안집사(安集使) 진자후(陣子侯)와 같이
서루(西樓)에 올라 시(詩)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403년(태종 3)에 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옛터에 중건한 이후,조선 전대에 걸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최근에는 1960년과 1962년에 기와를 갈고 보수를 하였으며,
1982년에 죽서루 경내를 3,813평으로 확장하고
담장과 평상문 등을 새로 축조하고 죽서루를 개수 및 번와하였다.
죽서루란 이름은 누각(樓閣) 동쪽에 죽림이 있었고 죽림 속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었다 하며,
또한 그 동편에 죽죽선녀(竹竹仙女)가 있었다 하여 지어졌다고 전해 온다.
전면의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縷)’의 제액(題額)은1711년(숙종 41) 부사 이성조(李聖肇)의 글씨이고,
누각(樓閣)안에 있는 ‘제일계정(第一溪亭)’이란 글씨는 1662년(현종 3) 부사 허목(許穆)의 것이다.
죽서루 입구의 관광안내도
죽서루 입구
죽서루에서는 멀리 태백 준령이 보이고 가까이는 근산(近山), 갈야산(葛夜山), 봉황산(鳳凰山)이 솟아 있다.
오십천 절벽 위에 장방형으로 자리잡은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 바다를 끼고 있지 않은 유일한 예이다.
죽서루(竹西樓)라는 이름은 대나무밭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또 부근에 죽죽선녀라는 유명한 기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국 가사문학의 태두인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느꼈던 것을 관동별곡으로 노래했다.
그중 제일 처음 언급한 것이 죽서루(竹西樓)다.
바닥이 울퉁불퉁한 오십천변 절벽 위에 길이가 각각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워수평을 잡은 죽서루는 누각 양편의 회화나무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그래서 송강은 죽서루를 관동팔경 중 제1경으로 꼽았을 것이다.
동해시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가 삼척항 입구를 지나 400m 가면 삼척교가 나온다.
삼척교를 건너기 전에 우회전하여 2km정도 가면 왼쪽에 죽서루가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의 아름다운 경관은 관동팔경의 한 곳이며,
삼척의 명기 죽죽선(竹竹仙)과 민족의 대서사시"제왕운기"를 쓴
이승휴와의 사랑 이야기가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죽서루는 동헌의 부속 건물로 접대와 휴식이 주목적인 향연을 위한 누각이라
관동 제일루라는 명성에 걸맞게 주변경관이 아름답다.
그래서 화가의 그림이나 시인의 글속에 많이 남아있다.
죽서루는 자연과 잘 어울리는 구조이고 바닥은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로 되어있다.
죽서루에서 보면 유유히 흐르는 오십천과 2002년 삼척에서 열렸던 동굴박람회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28호로 등재됐다.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는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오십천이 흐르는 강가에서 가장 절경지에 위치하고죽서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오십천 전망과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죽서루와
절벽부의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자연암반을 훼손하지 않고 건물의 주초로 사용 건축돼 주변 암벽 식생과 카르스트 지형 등이 조화를 이뤄경관적 가치가 크고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이 다녀가 경치를 읊은 시와 그림이 전하는 등
역사적 가치 또한 큰 명승지로 평가받고 있다.
죽서루 오십천과 함께 양양의 낙산 의상대와 홍련암도 명승으로 지정돼관동팔경의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죽서루(竹西樓) 동쪽 연근당 자리 곁에 있는 바위문으로 행초서로 용문(龍門)이라 새긴 음각글씨가 남아있으며,
바위 상부에 성혈유적이 있다. 용문바위 전설에는 죽서루 벼랑의 생성유래가 담겨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무왕이 죽어서 바다를 지키는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순행하다가 삼척 앞바다에서
지금의 죽서루 아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며, 강변의 절벽을 주변 경치와 어울리게
조각하고는 승천할 때 바위를 뚫고 올랐는데 그것이 용문이라 한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죽어서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죽서루의 용문으로 승천했기에 용문은 소원성취의
문으로 널리 알려져 지금도 많은 젊은 남녀와 특히 신혼부부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고 간다고...
죽서루 내의 보호수
죽서루에 들어서면 약 300 여년 이상된 고령의 회화나무가 세 그루 있다.
회화나무는 600여년 전 중국에서 들여온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나무로서
중국에서도 자금성 가장 안쪽에서 볼 수 있는 나무로 죽서루에 있는 회화나무는
기묘한 형상으로 꼬이면서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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