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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난파 홍영후선생"기념비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09. 8. 21. 05:45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난파 홍영후선생"기념비

     

    음악계의 선구자 난파 홍영후 선생(蘭坡 洪永厚 1898. 4.10~1941. 8.30)은 경기도 수원군(현재는 화성시)에서 태어나

    봉숭아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백곡을 남기신 홍영후(洪永厚) 선생은 우리나라 맨처음 바이올리니스트이시다.

    난파를 기리는 이들이 정성을 모아 그 모습을 여기 세우니 과연 인생은 짧아도 조국과 예술과 우정은 길구나...

    (수원시청앞 올림픽공원에서...)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의 작곡자이기도 하며,

    이밖에 다양한 문예활동을 통하여 일제강점기하의 한국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5세 때 상경, 14세 되던 해인 1912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가면서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13년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7년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음악·문학·미술 등 세가지 분야에 걸쳐 잡지 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재일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에 가담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귀국한 뒤로는

    《대한매일신보 》 등의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창작곡집 《처녀혼》을 출간하였다.

    대표작 〈봉선화〉는 《처녀혼》의 첫머리에 〈애수〉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 서울 연악회를 창설하고 교육 및 음악보급에도 진력하였다.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1926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한편, 1925년에 편찬한 《세계음악곡집》에 〈봉선화〉 등을 발표한 이래, 1929년 《조선음악백곡집》 상하권,

    1933년 《조선가요창작곡집》 등을 세상에 내놓았고, 현제명과 함께 합창곡 〈봄노래〉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주요작품으로는 바이올린독주곡 〈애수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 등이 있다.

    한편,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곡〉, 기타 《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 등을 출간하였다.

    그의 작곡경향은 한국 선율의 요소를 반영시켜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고자 하는 데서 발견된다.

    이같은 그의 의도는 그가 남긴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바로 이런 점이 그를 1930년대 이후

    한국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시킨 주요 작곡가로 평가하는 데 큰 몫을 한다.

    한편, 1931년 바이올린 수업을 위해 도미하여 셔우드(Sherwood)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본격적인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뒤로는 연주활동 이외에 주로 경성보육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가르쳤다.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의 지휘자,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이영세 등과 난파트리오를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에 관심을 가졌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평론집 《음악만필》 등을 통하여 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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