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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욕의 현장 "삼전도비(三田渡碑)"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1. 3. 1. 05:23

    치욕의 현장 "삼전도비(三田渡碑)"

     

    이 비는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太宗)의 요구로 세운 비석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라 지었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이조판서 이경석()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 전()은 여이징()이 썼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한문, 뒷면에는 만주문(滿)·몽골문으로 번역되어,

    한 비 안에 3개국 문자가 들어 있는 특이한 비석이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螭), 받침돌의 귀부() 조각도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조각의 하나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 주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청일전쟁 때 매몰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문교부(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에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서울시는 후세들에게 패배와 치욕의 사실()을 그대로 보여 교훈이 되도록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공원 일대에 500여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하여

    여기에 당시의 모습을 그린 부조비()를 세워 1983년 5월 문을 열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체 높이 5.7m.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재료는 비신은 대리석이며 귀부는 화강암이다.

     

     

    삼전도비의 내용


    비문의 내용은 청태종의 덕을 칭송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해 보면

    [1627년의 정묘화약 이후 우리(조선)가 화친을 먼저 깼음에 대방(청나라)이 노하여군사를 이끌고 동녁에 들어오셨다.

     우리 임금(인조)이 위태로움에 처해 남한산성에 거하신지가 50 여일이 되었다.

    관온인성황제(청태종)가 위엄과 법을 베푸는 도다.

    황제의 공덕이 조화와 함께 흐름을 밝히니 우리 소방(조선)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뿐이로다.
    처음엔 미혹하여 이를 알지못하다가 황제의 명(命)이 있으니 잠을 깨었도다. 이에 오직 황제의 덕에 의지하도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켜 다시금 우리에게 농사를 권하니 삼한(三韓) 말년에 황제의 아름다움 이로다.]이다.

    즉 삼전도비문의 내용은 조선이 청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어리석음에 빠져있다가
    다시금 청태종의 은혜를 입어 깨우침을 받고 평화를 얻게 되었다는 그런 맥락이다.

    흔히 조선시대의 2대 국치(國恥 : 나라의 치욕)하면 바로 병자국치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경술국치이다.

    병자국치(丙子國恥)는 1636년 병자년에 발발한 조선과 청나라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수모를 당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1623 ~ 1649)는 전쟁에서 패한뒤
    삼전도에서 수항단에 앉아있는 청태종 홍타이시 앞에 끌려나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예를 올렸다.
    이 "삼배구고두례"는 여진족의 풍습인데 한번씩 절을 할때마다 땅에다가 이마를 3번씩 박는다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이때에 인조의 이마에는 유혈이 낭자했다고하니 우리로서는 이만저만한 치욕이 아닐수 없다.

    그래서 이날을 잊지말자는의미에서 병자년에 일어난 국치라 하여 병자국치라고 하는 것이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는 1910년 8월29일 일제에 의한 경술년의 국치라는 뜻이다.

    경술국치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1910년 8월29일 우리가 일본에 멸망한 날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이는 병자국치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것으로 우리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론 절대 이러한 사건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비신(碑身)없는 귀부(龜趺)의 유래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 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당시 정황을 근거로 청의 강요에 의해 귀부가 새로 제작된 것이라고 문헌자료를 통해 검토하여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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