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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수원사랑/수원화성(水原華城) 2013. 1. 3. 08:00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은 화성능행도팔곡병(華城陵幸圖八曲屛) 가운데 하나로
화성능행도는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를 모시고
화성(華城:현재의 수원)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소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한 뒤
성대한 연회(진찬례:進饌禮)를 베풀었던 일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이때 거행된 중요한 행사들을 뽑아서 그린 것이다.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노량주교도섭도(露粱舟橋渡涉圖)이다.
웅장한 화면구성과 정교한 세부 묘사가 뛰어나며, 온화하고 안정감있는 색채를 사용하여 궁중행사도의 품위를 더하고 있다.
행사의 도설(圖說)을 김홍도(金弘道)에게 제작하게 하여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담아 놓았다가,
이 도설에 기초하여 김홍도를 따르던 김득신, 최득현, 이인문, 이명규, 장한종, 허식 등에 의해 병풍으로 제작했다고 추정된다.
비단에 채색된 조선시대 풍속화(151.5cm×66.4cm)로 2005년 4월 15일 보물 제1430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
1795년 윤2월 11일 정조대왕의 .수원 방문 첫번째 행사로 수원의 향교(鄕校)에서 성인(聖人)들에게 인사차 제사를 거행하는데,
수원 지역의 유생(儒生)들과 관료들이 참가하고 있다. “향교(鄕校)”는 조선 시대 국립 지방대학이다.
향교(鄕校) 내부에는 성묘(聖墓)가 있으므로, 성현들을 추앙하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다.
정조의 판위(版位)는 대성전 앞기둥 밖 동쪽 가까이에 서쪽을 향해 설치되었고 조복을 갖춘 승지와 사관이 시위하고 있다.
찬의(贊儀)와 인의(引儀)는 각각 동서 계단 아래에 서 있고 청금복을 입은 유생들이 대성전 뜰에 좌우로 나뉘어 앉아 있다.
융복을 입은 배종백관(培從百官)은 대성전 문밖에 정조의 봉심에 참여하고 있다.
정조의 대차가 마련된 명륜당의 담장에는 흰 휘장이 둘러져 있다.
성묘 둘레에는 호위군병과 의장이 도열해 있는데 이들의 긴장되고 딱딱한 모습과
구경 나온 백성들의 무리지어 늘어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매우 대조적이다.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1795년 윤2월 11일 정조대왕이 수원향교에서 성묘 전배를 마치고
유생들을 시취한 뒤 낙남헌에서 거행한 방방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과거(科擧) 시험 합격자 시상식으로 華城 행사 기념 과거(科擧) 시험 중 별시(別試)에 해당된다.
문과(文科) 5명, 무과(武科) 56명 합격하였다.
이날의 시험 문제는? “근상천천세세수부(謹上千千世歲壽賦)”로
혜경궁(惠慶宮)의 60세 생일 기념 별시(別試)였으므로, 혜경궁(惠慶宮)의 장수를 기원하는 부(賦)를 작문하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직접 출제를 했는데, 무과(武科) 실기 시험은 활쏘기로 정조대왕이 직접 통제하고 채점을 했다.
그리고 무과(武科) 합격자는 양인(平民)이 많았다.
29세의 평민 김성갑(金星甲)은 한량(閑良)이었는데.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조선시대에 평민은 과거(科擧)시험 참가 자격이 없다는 주장은 여기서 폐지된다.
물론 평민 김성갑(金星甲)은 이 때 당당한 武班으로서, “양반”이 되었다.
왜냐하면? 양반은 원래 귀족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고, 문반/무반(文班/武班) 관료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서장대성조도 (西將臺城操圖)
1795년 윤2월 12일 서울 호위 도시로서 새롭게 조성된 화성(華城)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는 군사 훈련 행사 장면이다.
장대(將臺)라는 것은, 성곽 방어 지휘 본부이다.
주간 훈련 및 야간 훈련이 수행되었는데, 그림에서 횃불이 밝혀진 것으로 보면, 야간 훈련 장면인 것 같다.
현대의 화력 시범에 해당하는데, 일종의 군사 퍼레이드 성격의 훈련이므로, 민간인들도 함께 참여하며 축제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정조대왕은, 대포의 폭발 소리에 어머니가 놀랄 것을 우려하여, 대포의 방향을 외곽으로 돌리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정조대왕을 보면,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공경이 극진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군주로서 모범을 보인다는 전시용 행동이 아니고,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확신이드는 것이다.
봉수당진찬도 (奉壽堂進饌圖)
1795년 윤 2월 13일에 거행 된 봉수당 진찬도는 현륭원 행차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로
혜경궁 홍씨의 탄신 일주갑(회갑)을 기념하여 베풀어진 진찬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진찬례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연회에는 친인척 82명이 초대되었다 한다.
그림은 화면 상단에 봉수당을 포치하고, 중량문을 지나 하단의 좌익문을 연결하는 행각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그 안쪽으로는 진찬광경이 그려져 있다.
봉수당 앞 계단에서 뜰에 이르기까지 임시로 덧마루를 설치하고, 대형 차일이 쳐진 백목장(白木帳)을 둘러 공간을 구분하였다.
봉수당 온돌방에 마련되어 있는 혜경궁과 내외명부의 자리는 주렴으로 가려져 있고,
보계의 왼편 앞쪽에는 병풍을 둘러쳐져 있으며, 그 안쪽에는 호피보료방석이 보이는데, 이는 정조의 자리임을 암시한다.
물론 위대한 인물을 그려 넣지 않는 조선시대 기록화방식을 따라 정조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호피방석이 2006년 보물 제1498호로 지정된 <조선후기 문인초상>의 방석과 유사하다는 점으로서,
정조시대 상층계층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덧마루 위에는 융복(戎服)차림의 의빈(儀賓)과 척신(戚臣)들이 좌우로 나누어 쭉 앉아 있으며,
그 중앙에는 여령(女姈)들이 음악에 맞추어 일종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중앙문 밖에는 어가를 호위해 온 백관(百官)들이 융복(戎服)차림으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찬탁(饌卓)위에는 술잔과 함께 하사받은 꽃(종이꽃)이 꽂혀 있다.
낙남헌양로연도 (洛南軒養老宴圖)
1795년 윤2월 14일에 정조대왕은 화성(華城)지역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개최한다.
노인 관료 15명. 화성(華城) 거주 노인 384명이며 신분은 구분하지 않았다.
참고로, 당시 화성(華城:현재의 수원)의 남성 인구는 약 3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정조대왕이 화성(華城)을 신흥 도시로 개발하기 시작한 초기였으므로, 아직 인구가 많은 곳은 아니었다.
노인들에게는 노란색 손수건을 묶은 지팡이를 지급하고, 비단 1필씩 선물로 지급하면서,
꽃도 나누어 주었다. 장엄한 궁중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양로 잔치가 개최되었고.
그리고, 384명을 제외한, 양로 잔치에 미처 참가하지 못한 나머지 노인들을 모두 수배하여,
자손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신분 구분 없이 음식과 술을 대접하였다.
제공된 음식은, 왕과 노인들이 모두 동일했으며, 이 때 78세의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계단을 올라 왕 앞에 나왔을 때,
정조대왕의 발언하길, "힘은 비록 좋으시지만, 80의 원로께서 어떻게 계단을 직접 올라오셨습니까?
또한 경(敬)은, 여러 노인들의 대표자 이십니다. 편하게 내려가서 바깥 정리를 지시하십시오.
조금 뒤에, 내가 뒤따라 내려가겠습니다." (왕과 신하는 상호간에 서로 존댓말을 사용했음.)
이외에, 수원 지역의 모든 백성들에게 각종 선물이 주어졌는데...
홀아비, 과부, 고아, 가난한 사람 등에게 혜택을 더 많이 주었다.
득중정어사도 (得中亭御射圖)
1795년 윤 2월 14일 정조대왕은 어사대가 있는 득중정(得中亭)에 임어하여 활을 쏘고
불꽃놀이를 즐겼는데. 이 불꽃놀이의 광경을 그린 것이 득중정어사도이다.
득중정이라는 명칭은 현륭원 천봉후 첫번째 맞는 사도세자의 탄신일에
수원부로 행차하였을 때 어사하고 그 사정을 득중정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면을 보면 좌측 위쪽에 차일이 쳐진 낙남헌이 작게 배치되고 그 안에 어좌가 마련되어 있다.
낙남헌 뒤로 노래당의 용마루가 이어지고 거기서 다시 우측으로 꺽인 곳에 위치한 득중정에도 사각형의 흰 차일이 설치되어 있다.
그 아래 어사대에는 혜경궁의 가교가 있고 명부들이 시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꽃놀이에는 혜경궁도 구경을 나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사대 우측에는 취병을 경계로 장춘각이 서 있고 그 아래에 화성행궁의 서쪽 담장이 조금 보인다.
화면 아래로 행궁 밖에 있는 몇 채의 건물이 일렬로 배치되었으며. 하단에는 화성의 성벽으로 마감되었는데.
그 왼편 구석에 보이는 옹성이 있는 이층 누각이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이라고 추정된다.
이 득중정어사도는 주변 건축이나 인물 묘사를 많이 집어넣어
현장의 상황을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감 나게 떠올릴 수 있게 하였다.
어사도를 그린 이날도 정조는 첫번째는 유엽전 30발을 쏘아 24발을 맞추었고,
두번재로 장혁(掌革)에다 3발을 명중시켰고, 세번재는 유엽전 25발을 쏘아 24발을 명중시킨 놀라운 솜씨였다.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
1795년 윤2월 15일 화성행궁을 떠나 시흥(始興)에 있는 행궁(行宮)으로 행렬이 도착하는 모습이다.
그림 중앙에 거대한 용기(龍旗)가 보이는데, 정조대왕(正祖大王) 어머니의 가마를 푸른색 휘장으로 둘러서
잠시 행렬을 멈추고,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어머니에게 다반(茶盤)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후, 그는 군복 착용 상태로 행궁(行宮)으로 먼저 가서, 직접 현장을 확인한 이후,
다시 돌아가서 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행궁(行宮)으로 간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도중에 행궁(行宮) 3곳을 거쳤으며,행렬 주변에는, 구경하는 백성들이 많이 있는다.
왕(王)의 행렬인데도 불구하고, '땅에 엎드려 조아림'하는 백성이 하나도 없는 것에 특이하다.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
1795년 윤2월 16일 화성행행의 마지막 날
당시 서울 남쪽의 한강 노량진(鷺梁津)을 지나가는 모습이다.
한강은 강의 폭이 600m 가량으로 너무 넓기 때문에,
현대적인 교량 건설 기술이 존재하지 않던 당시에는, 교량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용선(龍船)을 이용하여 도하(渡河)를 했었는데, 이것도 번거롭기 때문에 주교(舟僑)를 가설하여 이용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직접 저술한 국가 표준 주교인 '주교지남(舟橋指南)'을 통하여 확인 가능하다.
실제로 사용된 선박은 48척 이었는데, 그림에서는 축약되어 묘사되고 있다.원래 주교 가설 작업 기간은 20일 예정이었는데, 실제로는 11일 소요되어 완성되었다.
교량 중간의 가장 화려한 중심은, 왕(王)이 아니고, 왕의 어머니인 혜경궁(惠慶宮)이다.왕(王)은 그 뒤쪽에서, 왕(王)의 어머니를 보호하는 형세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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