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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스터 볼스 피어슨(Lester Bowles Pearson)
    해외 나들이/캐나다(加拿大) 2013. 11. 14. 04:30

    레스터 볼스 피어슨(Lester Bowles Pearson, 1897~1972)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뉴턴브룩(Newtonbrook)에서 출생하여

    토론토 대학의 빅토리아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모교인 토론토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되어

    1928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외무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후 캐나다 외무부 1등 서기관이 되어

    1945년에는 주미국대사가 되었고,

    같은 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헌장 조인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48년에 자유당에 들어가 외무장관을 하다가,

    1949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나토)의 조인에 캐나다를 대표하였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족적을 남겼다.

    국제분쟁 조정가 역할을 하며 활약한 것이 제일 크게 인정 받고 있다.

    1951년에는 나토의 의장으로, 1952년에는 유엔 총회의 회장으로 뽑혔다.

    한국전쟁 휴전 때도 유엔 고등판무관 역할을 했고

    무엇보다 제2차 중동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수에즈운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그 공로로 195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58년 당수 경선에서 폴 마틴을 누르고 당수에 당선되었다.

    그 후 1963년 4월 22일 총선에서 캐나다 제14대 총리에 취임했다.

    1964년 1월에는 캐나다 총리로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다.

    또 1965년 1월에는 미국-캐나다 자동차 협정을 체결했다.

    존 F.케네디 대통령과 회담 때,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탄두를 받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이유로

    린든 B.존슨 정부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피어슨 총리는 미국의 베트남 파병 요청을 거절했다.

    피어슨 총리는 방미 기간인 1965년 4월 2일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에서

    미국의 통킹만 폭격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강연을 했다.

    격분한 존슨 대통령은 다음날 피어슨 총리를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서

    약 1시간 동안 천장에 매다는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또한 국내 사정에 심각한 문제를 향하였다.

    영어와 프랑스어 사용자들 사이의 논쟁들이 국가적 조화를 위협하였다.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자기들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불평을 하였다.

    그래서 퀘벡 주의 분리 독립운동까지 일으키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캐나다의 경제에 붐이 일어나

    피어슨 정부가 사회복지사업을 공급하는 데 허락되었다.

    1968년 4월 21일에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세계은행 그룹의 총장이 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오타와의 외곽 록클리프 파크(Rockcliff Park)에 있는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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