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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4. 3. 8. 05:00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413~491년)이
414년 아버지인 광개토대왕(391~413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이 비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에 세워진 것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비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그리고 광개토대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이 적혀 있다.
이밖에도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한반도에 침입한 왜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1면 9행의 신묘년조(辛卯年條)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잘못 해석하기도 했다.
한편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점에서
광개토왕릉비는 역사적 진실을 말해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에서)
광개토대왕릉비 번역문(廣開土大王陵碑 飜譯文)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물의 신,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이 있었다.
□□□□□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 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이에)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승천(昇天)하였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왕의) 은택(恩澤)이 하늘에까지 미쳤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
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 ; 거란족의 일파)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으므로)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년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 600~700 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 ; 백제를 비하하여 쓴 호칭)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 ; 391년)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2자 缺) 신라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이 부분이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가장 쟁점이 된다. 비문 자체에 대한 조작 여부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영락 6년(396년) 병신(丙申)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利城), □□城,
각미성(閣彌城),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舍조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혈□□□□城, 頁□□□□城, □而耶羅城, 전성( 城), 어리성(於利城),
□□城, 두노성(豆奴城), 沸□□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城, 루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巖門□城, 임성(林城), □□□□□□□利城, 취추성(就鄒城), □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穰城), 曾□城, □□盧城, 구천성(仇天城)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이 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 ; 한강)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百)殘 임금이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 ; 신하)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太王)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 임금의 아우와 大臣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戊戌)년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숙신(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命)을 받았다.
영락(永樂) 9년(399년) 기해(己亥)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地)를 부수고
노객(奴客 ; 신라왕 스스로 신하라 일컫고 있다)으로 하여금 왜의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更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가운데 거의 대부분을 판독할 수 없다.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라인 수병(安羅人 戍兵)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 ; 왕)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명을 청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代)에 이르러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년) 갑진(甲辰)년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 수군을 동원하였다는 뜻) … 이에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사방에서 합전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노획한 갑옷이 만여 벌이었으며, 그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住城 □城 □□□□□□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庚戌)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한 성이 64, 촌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출신지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 간연(看烟)이 3가. 동해매(東海賣)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돈성(敦城)의 민은 4가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연(?連)의 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연(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공취해온 한(韓)과 예(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의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底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인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성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舊民)들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하셨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과 예의 220가를 데려다가 수묘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구 수묘호(守墓戶)를 합쳐, 국연이 30가이고 간연이 300가로서, 모두 330가이다.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셨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며, 산 자는 자신이 수묘하도록 하라” 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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