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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고 묘역(李皐 墓域)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4. 4. 12. 05:10

    이고 묘역(李皐 墓域)

     

    이고(李皐,1338-1420)의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호는 망천(忘川)이며,

    사온서령공(司醞署令公) 이윤방(李允芳,1310-?)의 아들이다.

    고려 말(高麗 末) 관직(官職)에 나아가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에 올랐으나

    고려가 쇠망(衰亡)해 가자 수원(水原)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였다.

    수원에서 널리 알려진 팔달산(八達山), 권선구(勸善區) 등의 지명은 모두 이고(李皐)와 관련된 것이고,

    1795년 정조(正祖)가 묘역(墓域)에 치제(致祭)하면서 팔달산주인(八達山主人)’으로 일컬어

    수원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묘역에는 후대에 마련한 것으로 추정되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과

    영조 9(1733)에 건립한 묘표(墓表)가 있다.

    대리석(大理石)의 비신(碑身) 앞면 중앙에 큰 글씨로

    고려한림원학사이고지묘(高麗翰林院學士李皐之墓)”라고 하여

    무덤 주인의 신원을 밝힌 후 뒷면에는 그 행적에 대해

    12대손 이봉익(李鳳翼)이 지은 글을 11대손 이량(李諒)이 써서 새겨 놓았다.

    이고(李皐) 묘역은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의 묘역으로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으로 평가된다.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51-1에 위치한 이고 묘역(李皐 墓域)

    200763일 수원시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고려 충신 한림학사 이고(高麗 忠臣 翰林學士 李皐)

     

    이고(李皐,1341~1420)의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호는 망천(忘川)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격동기를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광주(廣州)로 낙향하였던

    송산 조견(松山 趙狷, 1351~1425),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14~1387)과 함께 고려 말 3학사로 불리는 지사였다.

    1374(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제학, 사헌부집의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한림학사를 거쳐 1389(공민왕 원년)에 정3품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집현전직제학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이 들어서자 수원의 광교산(光敎山) 남쪽 탑산(塔山, 현재의 팔달산)에 은거(隱居)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관직을 주려고 불러도 오지 않자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그가 거처하는 곳을 그려오게 하였는데,

    그 모습이 사통팔달하여 막힌 곳이 없는 곳이라는 의미로 팔달산(八達山)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이름이 오늘 날 팔달구(八達區)로 남아있고,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아가길 권했다고 하여 권선구(勸善區)와 권선동(勸善洞)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조선 건국 후 잠깐이나마 강권에 의해 벼슬을 지내기는 하였으나 고려에 대한 충절은 끝내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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