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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화성(水原華城)의 축성(築城)내용,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
    수원사랑/수원화성(水原華城) 2014. 5. 17. 04:30

    수원화성(水原華城)의 축성(築城)내용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

     

    조선 제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1797(정조 21) 1월 김종수(金種秀)

    화성의 축성의 전반적인 사실에 대하여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을 주도적 계획하고 추진하였으며

    화성(華城)의 축성(築城)에 돌과 벽돌을 조화롭게 사용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 등의 이용은 정조대왕의 뜻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축성이 빠르고 튼튼하게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였다.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는 성역의 주역들이 바뀌면서 비()를 세우지 못하다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등재된 내용을 199111월 수원시에서 제작하여 장안공원에 세웠다.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의 내용은

    ()13년 기유년(己酉年,1789)에 우리 현륭원(顯隆園)

    수원부(水原府)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그 읍치(邑治)를 유천(柳川)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 경술년(庚戌年, 1790)에 원자(元子)가 탄생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계축년(癸丑年, 1793)에 상께서 수원에 거동하시어

    수원부(水原府)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킬 것을 명령하여

    체모(體貌)를 높였고 행궁(行宮)을 두어 우러러 의지할 뜻을 나타내었다.

    또 수원부에 성을 쌓을 것을 의논하였으니, 그것은 원침(園寢)은 강()의 남쪽에 있고,

    영부(營府)는 원()의 북쪽에 있어서 그것을 막아 지키는 방법으로 이 사업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규모(規模)와 제작(制作)은 모두 상의 뜻에서 나왔고, 계획(計劃)과 기율(紀律)도 모두 상의 결단을 따랐으니,

    유사(有司)는 명령을 받들어 가르침을 따른데 불과할 뿐이었다.

    상의 교서(敎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사업은 수원부가 기호(畿湖)의 요충지라고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000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선침(仙寢)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행궁(行宮)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덜어주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가까운 일이 있다면 비록 공사가 하루를 못 가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본의는 아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일은 먼저 그 대체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성을 쌓는데 중요한 것은 형편에 따라서 기초를 정하되 둥글거나 모나게 하지 말며,

    보기에 아름답게 꾸미지도 말고 이로움과 형세에 따라서 하라.

    공사를 감독하는데 중요한 것은 운반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옛 사람의 인중기(引重機)와 거중기(起重機)를 사용한 법을 강구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재물 모으는 방법은 그 조처하고 계획한 것이 있으니 스스로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다른 기부금도 받지 말도록 하라.

    모양을 꾸미는 방법으로는 위는 처마처럼 하고 아래는 돌층계처럼하여 지역에 따라서 쌓되,

    멀리는 중국의 법을 모방하고 가까이는 고상(故相)의 논한 것을 취하라,

    위대하도다! 왕의 말이여. 한결같도다! 왕의 마음이여.

    여기에서 모든 왕 중에 으뜸가는 효도와 백성들을 자식같이 여기는 인자함과 만물에 두루 베푸는 지혜를 볼 수 있다.

    갑인년(甲寅年, 1794) 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병진년(丙辰年, 1796) 가을에 이르러서 공사를 끝마쳤으니,

    그 기간이 모두 34개월이었지만 중간에 6개월을 쉬었으므로, 실지 공사에 소용된 기간은 겨우 28개월밖에 안 되었다.

    아아, 3년 동안 공사하는 사이에 두루 수많은 화살을 막아낼 성곽을 쌓는데 성공하였으니

    신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 같으며, 이에 우리 성상(聖上)의 성의 둘레는 무릇 4600 ()이니,

    도합 12리요,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무르녹은 봄의 버들잎 형상 같으니, 그것은 유천(柳川)이란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한 것은 원묘(園墓)가 화산(花山)에 있으므로

    ()자와 화()자가 서로 통하는 데서 취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화봉(華封)사람의 축성(祝聖)한 듯도 포함한 것이니, 모두 성교(聖敎)를 받들어서 시행한 것이다.

    성의 문은 4개가 있으니, 북쪽은 장안문(長安門)이요, 남쪽은 팔달문(八達門)이며, 동쪽은 창룡문(蒼龍門)이요,

    서쪽은 화서문(華西門)인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바로 우리 성상이 해마다

    선침에 배알(拜謁)하기 위해 지나는 길로 한양성과의 거리가 70리이다.

    산이 둥그스름하게 높이 솟아서 성의 진산(鎭山)이 된 것은 팔달산이다. 

    팔달산 정상에 장대(將臺)가 있는데, 그 위에 올라 보면 멀고 가까이에

    산봉우리들이 둘러 있는 것이 마치 뭇 별들이 북극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과 같다.

    산으로부터 내려와 창룡문(蒼龍門)을 지나서 다시 산에 올라 서쪽으로 가면 또 장대가 있고,

    그 나머지로는 공심돈(空心墩), 각건대(角巾臺), 화양루(華陽樓), 포루(鋪樓), 각루(角樓),

    암문(暗門), 용도(甬道), 옹성(甕城), 벽성, 노대(弩臺) 등이 있는데, 모두 그 지형의 형세를 따라 쌓은 것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옛날에 이른바 용두(龍頭)의 위에 있는데, 용연(龍淵)이 그 북쪽에 있다.

    이것이 성부(城府)의 대략이다. 재물이 80여 만금이나 들었고, 인부가 70여 만 명이나 들었는데,

    이것은 모두 왕실의 사재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계획한 것이요,

    돈으로 군정(軍丁)을 사서 성역에 나가게 하여 번거롭게 조발(調發)하지 않았다.

    또 무거운 것을 드는 기계와 유형거(遊衡車)를 사용한 것은 운반하기에 편리한 제도였기 때문이며,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농사짓고 호()를 파서 지키게 한 것은 먼 날을 염려한 꾀였다.

    겨울에는 옷을 주고 여름에는 약을 나누어 준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함이요,

    혹시 흉년을 만나면 부역을 정지하도록 특별히 명령한 것은 깊이 백성을 걱정하신 것이다.

    아아, 성왕(聖王)의 정치는 쓰기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릇 시행할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국고(國庫)를 바탕으로 하고,

    백성들이 수고로운 부역에 임하면 국가의 경비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이래로 밝고 의로운 임금들이 이미 행하여 왔던 것으로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이다.

    오직 우리 전하는 지혜가 하늘과 같아서 비용은 쌓아 두었던 재물로 경영하였고,

    인부는 모두 임금을 주고서 부리어, 국용은 한 오라기 터럭만큼도 허비됨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3일의 부역도 면하였다. 때에 알맞게 절제하였고,

    멀리서 가져오고 가까이에서 도모하여 열리지 않은 지리(地利)를 일으켰으며,

    함락되지 않을 금탕(金湯)을 만들어 놓았다. 이는 진실로 삼대(三代)의 융성할 적에도 없었던 일이요,

    오늘날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하물며 이 사업에 있어서 한 명령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뜻에 거스름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 일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힘을 해침이 있을까 두려워한 것은 진실로 과거에

    우리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연로(輦路)의 곡식 싹도 밟지 않으신 뜻을 본받은 것이다.

    비록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미련하기가 마치 벌레와 같은 저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무궁하신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지 않겠는가.

    뭇 장정들이 힘을 합하고 여러 공장(工匠)들이 앞서서 일하여 이 길고 넓은 우뚝한 성을 쌓아,

    길이 억만년에 천지가 다하도록 선침(仙寢)을 호위하고 행궁(行宮)을 보호하며

    서울의 날개가 되어 엄연히 기보(畿輔)의 큰 진()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한꺼번에 네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것이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며,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아아, 엄숙한 행궁(行宮)에 형상이 매우 가까이 보일 듯한지라,

    어진(御眞)을 받들어 사모함을 나타내었으니,

    이는 진실로 큰 성인의 무궁한 효도가 실로 국물만 보아도 모습이 보일 듯한 데서 나온 것이다.

    상상컨대 백세(百世)의 뒤에도 전하의 효도에 감동하여 전하의 마음을 슬퍼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시종(始終) 알아주심을 받은 늙고 천한 신()처럼

    그에 대한 감동이 아아, 하늘처럼 끝없는 자임에랴! 상의 21년 정사년(丁巳年, 1797) 정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원임 규장각제학 치사 봉조하

    (大匡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原任 奎章閣提學 致仕 奉朝賀臣)

    김종수(金種秀)는 교서를 받들어 지음.

     

     

    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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