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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고구려의 시조 "궁예(弓裔)"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4. 11. 17. 04:24

    후고구려의 시조 "궁예(弓裔)"

     

    ?~ 918(고려 태조 원년)

    후고구려의 왕(901년~918년 재위)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궁녀이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혹은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이름했다.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어났다.

    국고가 바닥이 나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草賊)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

    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지금의 평창)·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다.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저족(猪足:지금의 인제)·금성(金城)·철원(鐵原)을 점령한 뒤,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을 했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楊州)·견주(見州)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지금의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했다.

    이때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이해에 왕건에게 바닷길로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을 점령케 하여 서해상권을 장악하고 견훤(甄萱)을 견제했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이처럼 강성한 세력을 이루어가면서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고,

    신라 조정에 반발하는 세력을 포섭하는 등 신라에 대한 강한 적의를 보이고 신라 사회를 파괴시켜갔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이념이 뚜렷하지 못했고

    요역과 세금을 무겁게 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이때문에 민심을 잃게 되자, 918년(정개 5)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궁예는 옷을 바꿔입고 도망가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고려사'는 왕이 된 뒤 궁예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폭군으로 기술하고,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궁예는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왕권강화를 시도하는 등의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세력의 포섭에 실패하고 신라말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기 전에 제거되었다.

     

    =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 산정호수(山井湖水) 수변산책로에서 =

     

     

     

     

     

     

     

     

     

     

     

     

    미륵불(彌勒佛): 미륵보살

     

    임금이 된 궁예는 불쌍한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자기를 버린 신라 왕실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광기를 부리곤 했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날의 겸손함과 명석함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해서 신하들을 혼란에 빠뜨리곤 했다.

    궁예는 이미 예전의 궁예가 아니었다. 우울증과 광기가 심해 사람을 의심하고 성격마저 포악해졌다.

    거기다가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부처님이 내려와

    백성을 잘 다스려 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하였다.

     

     

     

    교사음일(驕奢淫佚): 교만하여 사치스럽고 방탕한 사람

     

    궁예는 점차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밖으로는 왕건으로 하여금 후백제의 나주 등을 점령하는 전쟁을 계속하면서 호화스러운 황궁을 짓게 하여 백성의 마음을 잃어 가게 된다.

    그리고 누구든 뜻을 거스리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말리는 왕후와 두 왕자를 처참히게 죽일 정도였다.

    궁예의 이런 행동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오는 심적 불안으로 인해 점차 몰락의 길로 빠지게 된다.

     

     

     

    궁예도은(弓裔逃隱): 도망쳐 숨은 궁예

     

    궁예가 임금으로서의 자질을 잃어가고 있을 때 신하들이 뜻을 모아 반역을 도모하여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처음에 망설였던 왕건은 불의를 치는 것은 반역이 아님을 깨닫고 의연히 이를 받아 들인다.

    이 사실을 들은 궁예는 옷을 바꾸어 입고 명성산으로 도망치게 된다.

     

     

     

    궁예분골(弓裔粉骨): 궁예의 참혹한 죽음

     

    명성산으로 도망친 궁예는 이틀밤을 숨어 지냈다.

    그러나 배가 고파 더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마을로 내려와 보리이삭을 잘라 먹었다.

    그러던중 농부에게 신분이 드러나 병사들에게 붙잡히게 되고 왕건에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가 서기 918년 봄이었다. 궁예는 그가 세운 왕국과 함께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칠장사 명부전의 궁예 벽화(경기도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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