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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저항 시인(民族抵抗 詩人), 이상화 고택(李相和 古宅)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5. 5. 21. 05:29

    민족저항 시인(民族抵抗 詩人), 이상화 고택(李相和 古宅)

     

    민족저항 시인이자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李相和, 1901 ~1943) 시인이 말년(1939년~1943년)을 보낸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대지면적 205m², 건축면적 64.5m²(단층 목조주택 2동)의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일제의 칼날에 맞선 저항시로

    나라 잃은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은 독립투사로

    학생들에게 민족을 깨우쳐주던 스승으로

    짧은 생을 불태운 시인 이상화

     

    봄이 오기를 목 놓아 노래했던 시인 이상화는

    제국주의 지배의 모순을 드러내며 형실 사회의 재건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벌인 저항시인이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민족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나의 침실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부단한 시작활동을 통해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가 바탕이 된

    투명하고 아름다운 시적 완성을 이루어 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 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 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 에는 내 혼자 온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드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마라 옷 자락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넘어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뿐 하다.

     

    혼자라도 기쁘게 나가자.

    마른 논은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 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 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 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 조차 빼앗기겠네.

     

     

     

    역천(逆天) / 이상화

     

    이 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 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장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 같은 길을 끄으며 바라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를 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 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지게 보이는 저 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이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옆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야 지금 내가 어데서 무엇 때문에 이것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 때와 어울려

    한 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이 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 하게 지쳤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 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 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 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용봉인학(龍鳳麟鶴)

     

    용과 봉황, 기린과 학을 말하며, 바로 이상화 선생의 4형제를 일컫는 말이다.

    목우 백기만 시인께서 자신의 저서(상화와 고월)에 밝히기를 상화 4형제를 용봉인학에 비유한 것이다.

     

     

     

     

    이상화시인의 생애

     

    이상화(李相和, 1901.4.5~1943.4.25)는 한국의 시인이다.

    호는 상화(尙火), 무량(無量), 상화(想華), 백아(白啞)이다.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이며, 어머니는 김신자이다.

    4형제 중 둘째 아들이고 큰형 상정은 독립운동가이다. 여덟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하였으며, 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주요인물이 잡혀가자 서울 박태원의 하숙집으로 피신하였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동인에 참여했고, 1922년 ‘백조’ 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25년에 작품활동을 활발히하면서 시 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번역에도 힘섰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와 1933년 교남학교(대륜고등학교)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어와 영어, 작문을 가르쳤다.

    1943년 3월에 위암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계산동 고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의 발의로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

     

    이상화 시인의 시는 감상적 낭만주의 시, 저항적 민족주의 시, 민족적 비애와 국토예찬으로 나눠지고

    특히 40년대 문인들 거의가 친일문학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은 그의 민족정기와 문학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작품활동 초기에는 “백조” 그룹등과 함께 하면서 “나의 침실로”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1926년경을 고비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식민지하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 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 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 에는 내 혼자 온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드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마라 옷 자락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넘어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뿐 하다.

     

    혼자라도 기쁘게 나가자. 

    마른 논은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 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 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 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 조차 빼앗기겠네.

     

     

     

     

    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의 개관에 즈음하여 한옥전시관을 기증해 주신

    동곡 남재현시인의 고마운 마음을 여기에 담아 기억합니다.

    靑丘大學 設立學長(청구대학 설립학장) 也靑 崔海淸 先生(야청 최해청 선생)옛집 터(1931~1947)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더 좋은 장소만들기 우리사랑상

    꼬불꼬불 골목길 근대路의 여행을

    대구광역시 중구청

     

    이곳은 주민들이 지혜와 뜻을 모아 일상의 생활공간을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아름답고 쾌적한 공간으로 가꾸었기에 정부가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을 드린 장소입니다.

    2009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

     

     

     

    2009 잘 가꾼 자연유산. 문화유산(대구 이상화고택)

     

    이곳은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미래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유한킴벌리가 공동주최한 제7회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지 시민공모전에서

     “2009 잘 가꾼 자연유산.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2009년 11월 19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유한킴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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