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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골목투어 근대路의 여행(대구 근대골목)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5. 6. 9. 05:30
대구 근대路의 여행(대구 근대골목)
대구를 넘어 대한민국 명소로 자리 잡은 대구 중구 근대골목,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앞선 세대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알게 됨은 물론 그들과 소통하고 공감한다.
세대 간의 대화와 이해 소통, 공감이 이뤄지는 곳이 근대골목이다.
근대골목은 시간을 공간을 초월하는 곳이다.
세대 간 벽을 허물어뜨리는 공간이다.
대구를 위해 병원과 학교를 세운 벽안의 선교사들, 3.1운동길에 들리는 듯한 만세소리,
예술가의 꿈과 추억이 서린 청라언덕까지 우리 고장의 자긍심을 만날 수 있다.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일제의 칼날에 맞선 저항시로 나라 잃은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은 독립투사로
학생들에게 민족을 깨우쳐주던 스승으로 짧은 생을 불태운 시인 이상화
봄이 오기를 목 놓아 노래했던 시인 이상화는 제국주의 지배의 모순을 드러내며
형실 사회의 재건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벌인 저항시인이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민족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나의 침실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부단한 시작활동을 통해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가 바탕이 된 투명하고 아름다운 시적 완성을 이루어 냈다.
서상돈(徐相燉, 1850.10.17~1913. 6.30)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이다.
경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1871년 대구로 가서 지물행상과 포목상등을 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 운동은 비록 일제의 방해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으나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관하여 한국인들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 계산성당(桂山聖堂) - 사적 제290호
이 건물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였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 완공하였다.
1911년에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평면은 라틴십자형이고,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 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건축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 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 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 에는 내 혼자 온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드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마라 옷 자락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넘어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뿐 하다.
혼자라도 기쁘게 나가자.
마른 논은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 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 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 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 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고택(李相和 古宅)
민족저항 시인이자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李相和, 1901 ~1943) 시인이 말년(1939년~1943년)을 보낸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대지면적 205m², 건축면적 64.5m²(단층 목조주택 2동)의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상정장군(李相定將軍) 고택(古宅)
1920년경 지은 한옥 골기와집으로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구성되었다.
이상정 장군(1897.6.10~1947.10.27)은 1916년에서 1945년까지 복무를 하였으며 대한독립군 중장을 역임했다.
독립유공자로서 일제강점기시인. 서예가. 화가. 조각가로 활동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일명은 이연호(李然皓)로
이상정장군은 이시우의 맏아들이자 시인 이상화(李相和). 사학자 이상백(李相伯). 수렵가 이상오(李相旿)의 맏형(兄)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동경의 국학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오산, 경신, 계성, 신명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1938년 김구, 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7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귀국하였고, 귀국 후 40여일만에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며, 장례는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여성 비행사 1세대중 한분인 독립운동가 권기옥(權基玉) 여사가 부인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90번지
선교사 블레어 주택(宣敎師 Blair House)
본 건물은 1910년경 미국인 선교사들이 블레어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은 집이다.
이 집은 동산위의 여러 주택 중 동산의 최남단에 위치한 붉은 벽돌쌓기 2층집 으로 남쪽은 경사지로 반지하실이 구성되어 있다.
평면구성은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1층은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를 두고,
현관홀을 통하여 응접실,거실,계단실을 직접 연결하였으며,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식당,부엌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구자형(口字形)의 계단 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었고 현관위의 베란다에는 썬룸(Sun Room)을 두었다.
외관은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콘크리트로 구축하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미식(美式)쌓기(3단길이, 1단마구리) 하였으며,
층간에는 벽돌로 톱니모양의 코니스(Cornice)를 들렸다.
창은 결원아치형에 목재오르내리창을 달고 밑인방을 벽돌 3단내쌓기로 하였다.
지붕은 박공면이 남북으로 향하는 것과 서향하는 것이 ㄱ자형으로 직교하며
동쪽과 서쪽으로 경사진 지붕면에는 쉐드형지붕으로 하였다.
건물의 남측과 서측에는 목조베란다가 설치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붉은벽돌을 쌓아 만든 굴뚝을 돌출시켰다.
건물 내부는 바닥이 장마루판이고 천정은 널판재를 대고 목재 반자돌림띠를 돌렸으며, 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여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건물의 형태 및 구조는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1989년 6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박태준(朴泰俊) 연보(年譜)
(1900. 11. 22~ 1986. 10. 20)
100여년 전 서양음악의 기초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던 대한민국에 우리 국민의 정서를 잘 반영한 작품들로
일제치하 속에 국민들의 고된 마음을 달래주던 작곡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우리나라 서양음악사의 지평을 연 박태준이다.
아호는 금호로 대구에서 출생한 박태준은 대구계성중학,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터스칼럼대학, 웨스트민스터음대와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 “기러기”와 최초의 가곡 “동무생각”을 비롯하여 “오빠생각”, “맴맴” 등의 곡을 지었으며,
동요곡집 “중등 때때중”과 “양양 범벅궁”, 가곡집 “물새 발자욱” 등을 발간하였다.
경남 마산 창신학교교사, 경성여의전 교수, 연세대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생 음악활동을 하면서 150여곡의 동요와 가곡을 작곡하여 우리나라 음악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57년 서울시 음악문화상과 1960년 예술원 음악공모상, 1962년 문화훈장,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노래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청라언덕
대구가 고향인 작곡가 박태준(1901-1986)이 곡을 짓고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인 가곡이 ‘동무생각(思友)’이다.
바로 이곳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겨있던 청라언덕이고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던 신명학교 여햑생이란다.박
태준의 꿈과 추억이 서린 이 곳에 노래비를 세운다.
이 언덕을 찾는 이들의 가슴에 청라언덕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길 기원하면서...
동무생각
작곡: 박태준, 작사: 이은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은혜정원(Garden of Mercy)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가족들이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다.
지금도 이 민족의 복음화와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리라.
선교사 챔니스 주택(House of American Missi0nary Chamness)
이 건물은 1910년경에 미국인 선교사(宣敎師)들이 거주하기 위해 지은 주택이다.
이 건물은 1907년(대구읍성 철거 때)가져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집은 남북 쪽으로 약간 긴 네모 형태를 이루고 있다.
1층 서쪽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홀이 있고,
이 홀을 중심으로 거실,서재,부엌,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의 침실을 두고 욕실,벽장 등의 부속공간을 마련했다.
1층 동남쪽에는 거실 등에서 이용할 수 있는 비교적 넓은 베란다를 시설하였다.
이러한 건물의 양식은 당시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bungalow)풍으로,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선교사 스윗즈 주택(House of American Christian Missionary Switzer)
이 주택은 1893년부터 대구를 찾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1910년 경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07년(대구읍성 철거 때)가져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
현관을 들어서면 거실. 응접실로 연결되며,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실, 침실 등이 있다.
2층은 계단홀을 중심으로 남쪽에 2개의 침실과 북쪽에 욕실을 배치하였다.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와 내부 구조는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구의 초기 서양식 건물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대구 3.1만세운동길(90계단)
이 계단은 대구 청라언덕길 입구에 있는 3.1운동계단으로
일제가 공사했는데, 조금 가파른 길이지만 당시에는 사람과 이륜차, 마차가 통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19년 3월 8일 만세 함성이 메아리친 곳으로 대구지역의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서문시장 큰장터를 향해 달려가던 애국의 혼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대구제일교회(大邱第一敎會)
대구, 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1893년 파송한
베어드(William M. Baird, 裵偉良,배위량) 목사에 이어 아담스(James E. Adams, 安義窩,안의와) 목사에 의해
1898년 남성로에서 기와집 4개동의 건물로 초창기 교인 서자명(徐子明). 정완식(鄭完植) 등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1908년 동서양식을 합작한 360m²의 단층 예배당이 새로 지어졌으며,
1933년에는 세 번째 건물인 2층으로 된 1,500m²의 예배당과 함께 교회 이름을 제일교회로 바꾸었고,
1936년에 현재 모습의 종탑을 세워 완전한 교회 모습을 갖추고 대구 및 경북 각 지방에 지교회를 분립하였다.
본 건물은 성도의 증가로 1994년 동산동으로 새성전을 이전해 가기까지 60여 년간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대구 근대路의 여행
대구읍성안 종로, 진골목, 장관동, 천개의 골목, 천개의 이야기 속으로 ~
길이 끝나는 곳에 새로운길이 시작됩니다.
2999 '국내 나들이 > 관광지(觀光地)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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