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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경술국치전
    카테고리 없음 2015. 10. 10. 06:19

    군산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경술국치전(庚戌國恥展)

     

    군산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 등록문화재 제374호

     

    군산근대건축관의 본래 이름은 (구)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1922년에 지어졌다.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2층 건물로 지붕은 함석판을 이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하였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는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소개된다.

    (구)조선은행은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한국은행에 기원을 두고 있으나,

    을사늑약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하였다.

    일제의 경제수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물로 보수,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년(1910년) 8월 29일을 일컫는 말이다.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르며,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것에 대해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한일합방(韓日合邦), 한일합병(韓日合倂) 등의 비겁한 용어를 썼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大韓帝國)과 일본제국(日本帝國) 사이에 합병조약(合倂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8월 29일 조약이 공포되어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써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영원히 잊지 말아야할 8월29일,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

     

    1910년 8월29일, 일제의 강탈로 “경술국치(庚戌國恥)”,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된 날이다.

    우리민족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 날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란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년(庚戌年, 1910년) 8월29일을 일컫는 말이다.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부르며,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것에 대해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한일합방(韓日合邦), 한일합병(韓日合倂) 등의 용어를 썼다.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인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통감인 데라우지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8월29일 조약이 공포되어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모두 8개조로 구성된 이 늑약문의 첫 번째 조항에는 “대한제국의 황제폐하는 대한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는 조항을 넣어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제에 완전히 빼앗김으로서

    이때부터 대한민국은 암흑과도 같은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고

    조국의 광복을 맞기 위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중군, 윤봉길 같은 독립투사는 물론

    역사 속에 잊혀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죽음과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경술국치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대한 나라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제규모와 세계를 누비는 우리 기업들의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며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세계를 전도하는 주도적인 국가로 거듭 태어났다.

    이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경술국치”의 치욕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각오를 되새기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치욕적인 일들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개인의 영달에 나라를 팔다

     

     

    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乙巳條約)

     

    을사오적(乙巳五賊)은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대사로 고종을 만나 ‘한일협약안’을 제출했다.

    11월 14일 이토는 고종을 다시 만나 체결을 강요했고, 다음날 각 대신들을 납치하여 조약체결을 강권했다.

    11월 17일에 열린 군신회의 결과 조약거부로 결정이 나자 이토는 귀가하는 대신들을 위협해

    다시 회의를 열게 하고 대신 한 사람마다 조약체결 찬성 여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만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이로써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한일합병 후 을사오적은 모두 일제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

     

    정미칠적(丁未七賊)은 대한제국에서 을사조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제3차 한일협약 또는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사람을 가리킨다.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농상공부대신 송병준(宋秉畯),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내부대신 임선준(任善準)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명의로 체결된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하고 순종의 재가를 얻도록 협조했다.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07년 6월 한국이 일제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에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묻고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외상 하야시 다다스(林董)와 한국의 국권을 빼앗는 내용의 신협약을 작성하여

    1907년 7월 24일 정식으로 한국정부에 제출했다.

    그러자 이완용 내각은 하루 만에 찬성하여 순종의 재가를 얻었다.

    공포된 7조약은 ①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휘를 받을 것,

    ② 한국정부가 하는 법령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③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행정사무와 이를 구별할 것,

    ④ 한국의 고등관리의 임명·면직은 통감의 동의를 얻을 것,

    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할 것,

    ⑥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관리로 등용하지 못함,

    ⑦ 1905년 8월 22일에 가결한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등이다.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

     

    경술국적(庚戌國賊)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에서 한일합병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시종원경 윤덕영(尹德榮),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李秉武),

    이완용의 처남인 승녕부총관 조민희(趙民熙) 여덟 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합방의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완용(李完用, 1858~1926) 을사5적신(賊臣)의 한사람, 최악의 매국노

     

    이병무(李秉武, 1864~1926) 고종 양위와 군대해산, 국권피탈에 적극 협조

     

     

    박제순(朴齊純, 1858~1916) 을사5적신(賊臣)의 한 사람,

    1910년 조선의 경찰권을 일본에 넘겨주었고 그해 8월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하였다.

     

     

    이근택(李根澤, 1865~1919) 일본으로부터 국권침탈의 공으로 자작(子爵) 작위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윤덕영(尹德榮, 1873~1940) 국권피탈 때 순종에게 강요, 합방조약에 옥새를 찍게 함.

     

     

    조중응(趙重應, 1860~1919) 한일합방 때 조약 체결에 찬성, 매국 7역신의 한 사람

     

     

     

     

    경술국치, 그 날을 기억하라

     

     

    봉공대(奉公袋)

     

    봉공대는 군대수첩, 훈장, 기장, 증명서. 소집점호영장, 저금통장, 군인의 일상 용품을 넣는 주머니이다.

     

     

    문대(慰問袋)

     

    위문대란 군인들에게 지급할 위로물품이 든 주머니를 일컫는 말이다.

    일제는 조선 여성들을 동원하여 위문대를 제적하게 하였다.

     

     

     

     

     

     

     

    나라를 잃었던 자들아 그날을 기억하라

    경술국치, 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조선(朝鮮)은 병참기지(兵站基地)

     

    3.1운동 후 이른바 16년간의 문화 정치기간 일제의 회유와 이간책에 불신과 절만으로

    지쳐가던 우리민족은 점차 패배주의적 자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광기어린 전쟁의 희생물이 됨으로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중일전쟁을 앞두고 7대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일명 조선의 히틀러로 불린 자로

    일본정부에서 전쟁 준비를 위하여 한국에 보낸 자이다.

    그는 총독으로 부임한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과 “조선불온문서임시단속령”을 제정하여

    조선인 감시를 강화하고 이듬해부터 조선어 금지와 일본어사용,

    그리고 1904년에는 창씨개명을 통하여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조선사람을 일본인화하여 동원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공출대용 사기그릇

     

    일제는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놋그릇을 빼앗아가고 대신 사기그릇을 주었다.

    숟가락마저 빼앗긴 집에서는 조개껍질로 밥을 먹기도 했다.

    사기그릇 밑면에는 전쟁승리를 기원하는 의미의 이길勝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어 말살정책

     

    조선인을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쓰려면 말이 통해야 하니 우선 일본말을 가르쳐야겠어.

    일본 군인으로 만들려면 일본식 이름도 필요하겠군. 이 모든 것이 천황폐하의 승리를 위해서야!

     

     

     

     

     

     

     

     

     

    민족의 함성

     

    강용면 작가의 '민족의 함성' 이라는 작품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공헌한 독립유공자의 인물을 표현한 작품이다.

     

     

     

     

     

     

     

     

     

     

    군산 내항(群山 內港)은 일제가 1899년 개항 이래 호남 곡창지대의 쌀과 농산물, 각종 자원을 수탈해갈 목적으로

    군산을 선택하고 철도와 항만을 조성했고, 반출 하는 무역이 급증하자 항만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군산항 축항공사를 1905년에서 1938년까지 4차에 걸쳐 실시하였다.

    특히 마지막 제4차 축항공사는 군산항을 일본의 병참기지화 하려는 목적이 강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는 군산은 부산, 인천에 이어 남한의 3대 무역항이었다.

    군산은 20세기 초 까지만해도 한반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 중 하나로

    1970년대까지 원목과 사료 등을 취급하는 군산의 대표적인 항구였지만,

    이제는 선박의 대형화 추세로 작은 어선들이 드나드는 작은 항구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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