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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4. 11. 04:44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선조 8년(1575)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 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 모습이다.

    류성룡은 선조 때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선생을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서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講學)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祭享) 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 14년(1863)에 "병산(屛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존속된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으로 서 있는 것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庫直舍)이고,

    입교당의 서쪽 뒤편에 서 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다.
    입교당의 동쪽 뒷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尊德祠)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열려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이름나 있다.




    한국(韓國)의 서원(書院)’20197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9곳을 세계유산에 등재하였다.

    포함된 서원 9곳은 소수서원(경북 영주), 남계서원(경남 함양),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필암서원(전남 장성), 도동서원(대구 달성), 병산서원(경북 안동),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이다.




    기념식수

    미국 제41대 George H.W Bush 대통령과 부인 Barbara Bush 여사께서 병산서원 방문기념으로 심으셨다.

    2005년 11월 13일





    복례문(復禮門)


    복례문(復禮門)은 병산(屛山) 서원(書員)의 정문으로 정면 3칸이나 중앙 칸을 솟을대문으로 하여 출입하도록 하였다.

    복례(復禮)란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서원의 정문은 3문(三門)을 두어 출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을 중앙 칸으로만 출입하도록 하였고 좌우 칸은 벽체로 막은 방으로 되었다.
    3문(門) 3칸 형태로 되어 있지만 가운데 1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의 칸은 벽체로 담장과 연결부되어 있다.

    동쪽 칸은 말을 매어 두던 곳으로 사용하였고, 서쪽은 창고로 사용하였다.
    서원의 정문은 3문(三門)을 두어 출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문을 중앙 칸으로 출입하도록 하였고 좌우 칸은 벽체로 막은 방으로 되었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광영지(光影池)


    광영지(光影池)는 병산서원의 출입문인 복례문(復禮門)과 만대루(晩對樓) 사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네모난 모양의 연못은 땅과 여성을 상징하고, 둥그런 인공 섬은 하늘과 남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만대루(晩對樓)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200여 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은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기둥들과 자연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 중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 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입교당(立敎堂)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강학당(講學堂), 한마디로 수업을 받던 '교실'이다.
    입교당은 중앙은 강학당(講學堂), 동쪽으로 명성제(明誠齊), 서쪽으로 경의제(敬義齊)로 모두 세칸을 나누어져 있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 라는 뜻의 입교당은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병산서원의 중심역할을 하는 곳이며,

    건물 앞면에는 병산서원(屛山書院) 편액이 걸려 있다.









    강학영역 - 입교당. 동재. 서재


    강학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立敎堂)인데, 원장과 유생들이 모여서 강론을 했던 곳이다.

    강당은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도는 건물이기도 하다. 강당의 동쪽 방인 명성제(明誠齊)는 원장이 기거하던 곳이며,

    서쪽방인 경의제(敬義齊)는 교수와 유사(儒士)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 정면에 서 있는 석조물은 밤에 불을 밝히던 정료대이다.

    강당의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유생들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에 기거하였다.

    서재의 작은 방은 장서실(藏書室)로 책의 보관을 위해 온돌을 놓지 않고 마루를 깔았다.

    입교당의 대청마루 한 가운데에 앉아 만대루를 통해 병산을 바라보면 강과 산으로 수놓은 일곱폭의 병풍을 펼쳐놓은 듯 아름답다.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위패가 모셔진 존덕사의 동쪽에 위치하며, 제사를 지내기 전날 제수를 보관하는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과 같은 울타리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서원의 전사청은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내삼문의 동쪽에 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음력 1일~10일 사이의 날 중 천간이 정으로 된 날)에 향사를 지낸다.











    보호수(수종: 배롱나무)


    고유번호 08-04-1
    지정일자: 2008년 4월 7일
    수령: 380년
    수고: 8m
    나무둘레: 0.85m




    존덕사(尊德祠)

     
    병산서원 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서애 류성룡선생과 셋째아들인 류진의 위패가 모션진 사당이다.




    장판각(藏版閣)


    서원에서 펴낸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주사


    주사는 병산서원 '지킴이'의 집으로 서원의 맨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제향영역


    제향역역은 향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이자 제자인 수암 류진(修巖 柳袗, 1582~1635)의 위판을 모신 존덕사(尊德祠)가 있다.

    류진이 이곳에 추가로 배향된 것은 현종 3년(1662)이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 좌우로 담장을 둘렀다.

    경사진 지형에 서원을 짓고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또한 강학 공간은 선비정신에 따라 검소하고 단아하게 꾸민데 비해,

    제향 공간은 단청도 하고 태극문양으로 장식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과 같은 울타리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서원의 전사청은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내삼문의 동쪽에 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음력 1일~10일 사이의 날 중 천간이 丁으로 된 날)에 향사를 지낸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류성룡(柳成龍)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후에1590년 통신사로 갔던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서인이 아닌 이산해와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아계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노량해전과 같은 날인, 정인홍, 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도산서원에 있는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류성룡 연보
    o 1545년 (인종 1년) 4세 : 이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
    o 1547년 (명종 2년) 6세 : 대학(大學)을 배우다.
    o 1549년 (명종 4년) 8세 : 맹자(孟子)를 읽다.
    o 1554년 (명종 9년) 13세 : 동학(東學)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강독(講讀)하였음.
    o 1555년 (명종 10년) 14세 : 향시(鄕試)에 합격.
    o 1558년 (명종 13년) 17세 : 부인 전주 이씨(李氏)를 맞이 하였음.
    o 1560년 (명종 15년) 19세 : 10월 관악산 암자에 들어가 맹자(孟子)를 공부함.
    o 1561년 (명종 16년) 20세 : 고향 하회에 돌아와 춘추(春秋)를 읽다.
    o 1562년 (명종 17년) 21세 : 9월 도산(陶山)에가서 퇴계선생을 찾아 뵙고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근사록' (近思錄) 등을 수업(修業)하였음.
    o 1563년 (명종 18년) 22세 : 가을에 진사생원(進仕生員)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
    o 1564년 (명종 19년) 23세 : 7월 생원회시(生員會試)에 1등, 진사에 3등으로 합격.
    o 1565년 (명종 20년) 24세 : 태학(太學)에 들어감.
    o 1566년 (명종 21년) 25세 : 10월 문과(文科)에 급제.
    o 1567년 (명종 22년) 26세 : 4월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임명.
    o 1569년 (선조 2년) 28세 :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
    o 1571년 (선조 4년) 30세 : 3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됨.
    o 1573년 (선조 6년) 32세 : 2월에 이조좌랑에 임명됨.
    7월 13일에 관찰공(선생의 아버지) 상을 당하셨습니다.
    o 1576년 (선조 9년) 35세 : 1월에 원지정사가 완성됨. 4월에 사간원헌납에 임명. 다시 사헌부장령에 임명.
    o 1577년 (선조 10년) 36세 : 2월 여강서원의 퇴계선생 봉안문을 짓다.
    o 1580년 (선조 13년) 39세 : 특명으로, 상주목사로 임명되다.
    o 1581년 (선조 14년) 40세 : 1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
    o 1583년 (선조 16년) 42세 : 1월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o 1585년 (선조 18년) 44세 : 3월에 왕명으로 정충록(精忠錄) 발문(跋文)을 지어올림.
    o 1587년 (선조 20년) 46세 : 퇴계선생의 문집을 편차(編次) 하였음.
    o 1588년 (선조 21년) 47세 : 10월에 형조판서에 임명.
    o 1589년 (선조 22년) 48세 : 봄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
    o 1590년 (선조 23년) 49세 : 5월 29일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
    o 1591년 (선조 24년) 50세 : 7월에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게 함.
    o 1592년 (선조 25년) 51세 : 4월 왜군이 부산에 침입하여, 이에대비,조치함.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
    o 1593년 (선조 26년) 52세 : 1월에 평양성을 탈환.
      10월 왕이 서울에 돌아오고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
    o 1594년 (선조 27년) 53세 : 충주를 중심으로 한강 상류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 조령에 관문과 둔전(屯田)을 마련할 것을 건의.
    o 1595년 (선조 28년) 54세 : 경기, 항해, 평안, 함경 4도 도체찰사에 임명.
    o 1596년 (선조 29년) 55세 : 군사를 훈련시키는 규칙을 정하여 각 도에 내려보냄. 

    9월에 4번이나 사직원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음.
    o 1597년 (선조 30년) 56세 : 2월에 5차례 사직월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음.
    o 1598년 (선조 31년) 57세 : 11월 19일 파직.  12월 5일 삭탈관직 되었음.
    o 1599년 (선조 32년) 58세 : 2월 16일 하회로 돌아옴.
    o 1600년 (선조 33년) 59세 : 퇴계선생 연보(年譜)를 초(抄) 함.
    o 1601년 (선조 34년) 60세 : 3월 5일 백씨 겸암선생이 돌아가심.
      8월 21일 어머니 정경부인 김씨가 돌아가심.
    o 1602년 (선조35년) 61세 : 2월에 신종록(愼終錄)을 짓다.
     4월에는 영모록(永慕錄)을 짓다.
    o 1604년 (선조 37년) 63세 : 3월에 다시 부원군에 봉해짐.
    o 1605년 (선조 38년) 64세 : 1월에 지행설(知行說)을 짓다. (지행합일설)
      4월에 큰아들이 죽다.
      제왕기년록을 짓다.
      9월에 서미동으로 이사함.
    o 1606년 (선조 39년) 65세 : 3월에 서미동에 초당을 지음.
      조명(釣名)설을 지었습니다.
    o 1607년 (선조 40년) 66세 : 3월 3일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였음.
      9월에 왕에게 유소(遺疎)를 씀.  조카에게 명하여 유계(遺戒)를 쓰게함.
    o 1614년 (광해 6년) : 병산서원에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함.
    o 1620년 (광해 12년) : 여강서원의 퇴계선생 사당에 배향(配享) 하였음.
    o 1627년 (인조 5년) : 남계서원에 봉안함.
    o 1629년 (인조 7년) : 문충공(文忠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림.
    o 1631년 (인조 9년) : 도남서원에 위판을 봉안함.
    o 1643년 (인조 21년) : 삼강서원에 위판을 봉안함.
    o 1689년 (숙종 15년) : 빙계서원에 위판을 봉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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