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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관아 비석군(濟州牧官衙 碑石群)과 주춧돌국내 나들이/제주도(濟州道) 2016. 4. 11. 20:12
제주목관아 비석군(濟州牧官衙 碑石群)과 주춧돌
제주목관아에는 조선시대 비석군이 있다.가장 오랜 비석으로 1706년 윤구동 목사의 선정비이며 조선후기 1890년대 비석까지 모두 12기다.
그 중 가장 특색 있는 비석은 대원군 형이신 이최응 영의정 비다.
년 고종 14년 정축년, 1878년 고종 15년 무인년 제주는 가뭄이 극심하여
제주백성이 다 죽게됨을 알고 구휼미를 보내어 살려준 고마음이 영세불망비이다.
제주에 조선시대 목사, 판관, 현감 선정비가 148기 있는데 모두 제주에 왔던 관료들이지만이최응 영상은 제주에 오지 않았지만 음덕을 베풀어 준 고마움에 도민들 뜻을 모아 세운 비로 더 관심을 가져볼만 하다.
비신이 약 180cm, 약 폭 60cm, 약 두께 15cm 제주현무암으로 제작했고 글씨도 크며 깊게 새겨서 아직도 건재하다.
제주에 옛 비 중 가장 큰 비석이다.
옆에는 양헌수(1867년 3월에 세움) 목사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다.領相李公最應永世不忘碑(영상이공최응영세불망비)
규격: 73×214.5×29.5㎝
건립연대: 1872년
비문내용
聖上卽阼之初載 公爲大冢宰 對揚洪休 總理庶務 靡不庸極 而於吾土尤加意焉
於丁戊之兩歉也 三州人民 殆將盡劉 而公稟裁筵席 量運湖南社倉米 以活之
又選良守 先意承膺 遇事必濟 至今吾鄕之尙保食息安 此田里者 伊誰之力若其
試之別書州號也 科榜 冒籍之嚴覈也 蓮榜之優選也 西班之宣薦創始也
武擧之人榜尾特付也 纖悉畢擧 皆出籌畫 而斷白 宸東焉 州人德之
咸願記蹟以圖不朽 爰屬貞珉竪之通衢 使後世子孫 目存而心不忘云爾
系之以詩曰 飢誰爾哺 惠誰爾施 我后在上 賢相輔之 崇禎紀元後五庚辰 孟秋
上澣 通判 宋祥淳 謹識 進士 金亮洙 謹書
임금(高宗)께서 즉위한 초년에 공(公)은 영의정이 되어 왕명(王命)에 감사하고
모든 사무를 총괄하여 관리하는데 지극히 힘쓰지 않음이 없었다.
우리 지방에 대해서는 더욱 더 주의를 기울였다.
지난 정묘(丁卯 : 1867년. 고종 4)․무진(戊辰 : 1868년. 고종 5) 두 해의 흉년에 세 고을 백성들이 거의 다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공(公)은 경연(經筵) 자리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재가를 받고 호남의 사창미(社倉米)를 다소 실어다 도민을 구제하였다.
또 어진 목사(白樂淵을 지칭)를 선발하니 먼저의 뜻을 이어받아 일이 생기면 반드시 구제하였다.
지금까지 우리 고장 사람들은 아직 까지 식량이 보장되어 편하게 쉬게 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여! 저 누가 그와 같이 힘썼던가. 정시(庭試)에서 고을 칭호를 따로 기록하며,
과방(科榜)에서 호적을 속이는 것을 엄중히 조사하고,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람들을 우대하여 뽑고,
서반(西班)에서 선전관(宣傳官) 천거를 창시하고, 무과(武科)의 향시(鄕試) 합격자를 방(榜) 끝에 특별히 붙이는 등,
모든 과거에 대해 자세히 알아, 모두가 공(公)의 헤아린 계책에서 나왔지만 반드시 대궐에 아뢰어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고맙게 여겨 모두가 그 자취를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를 원하니,
이에 비석에 새겨 큰 거리에 세우고 후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잊지 않으려 한다.
시로 맺어 말하되 “굶주릴 때 누가 그대들을 먹여주었으며, 은혜를 누가 그대들에게 베풀었는가.
우리 임금이 위에 계시고 어진 재상이 보필하였음이니......”
숭정(崇禎) 기원후 다섯 번째 경진(庚辰 : 1880년. 고종 17) 7월 상순 판관 송상순(宋祥淳)이 삼가 짓고 진사 김양수(金亮洙)가 삼가 쓰다.
※ 이최응은 1815년(순조 15) ~ 1882년(고종 19) 조선말기의 문신.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중형(仲兄)이다.
흥인군(興寅君)에 봉해졌으나 대원군과 뜻이 맞지 않아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1873년(고종 10) 대원군 실각에 가담하여 민씨(閔氏)가 정권을 잡자 호위대장에 천거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유원(李裕元)의 후임으로 영의정을 지냈으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때 대원군이 사주한 난병에게 희생되었다.
使相梁公憲洙永世不忘碑 (사상양공헌수영세불망비)
규격: 68×181×29.5㎝
건립연대: 1867년
비문내용
同治 六年三月 日 營牧鄕將吏及各廳
1867년(고종 4) 3월에 제주영(군사적차원의 명칭)과
제주목(행정적차원의 명칭)의 향리․장교․서리 및 각 청에서 합심하여 세웠다.
※ 양헌수 목사겸방어사는 1864년(고종 1) 3월에 부임하고 1866년(고종 3) 8월에 떠났다.
재임중 「훈민편(訓民篇)」을 저술하여 도민을 순화 계도하였으며,
1865년 가을에 태풍으로 극심한 흉년이 들어 조정에 구원을 호소하여
내탕금(內帑金) 2천냥을 하사받아 태풍을 복구하는 한편 도민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조정에서 양헌수를 1년 유임하여 도민 구휼에 힘쓰도록 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때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므로,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올랐으며 척화론자로 신임을 얻어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行牧使尹公堦敎民善政碑 (행목사윤공계교민선정비)
규격: 48×109×13㎝
건립연대: 미상
비문내용
高王考翼正公府君在□閣 爲時相所擠 以顯宗壬子□□莅玆土 六月而歸 民久而益懷之 越三十五年丙戌 立石追頌焉 事之載觀風案中
後乙酉不肖忝繼先蹟來 卽考案而訊之 土人尙能說遺愛碑 則尋之不得 其必毁泐 爲民家墻礎之用矣 遂謀伐石重刻 翌年春竪之東城之隅
去碑之始建 適周一甲子亦異哉 嗚呼 區區外邑之績 顧府君餘事 況玆一片石之有無 尤豈足爲輕重也 雖然
不肖之欲觀感寓慕 以無忌纘戎之義 以無得罪於州之民士 繄碑是程觀者諒之
崇禎三丙戌 仲春 玄孫 通政大夫行濟州牧使 蓍東謹識 尹公敎民碑
고조부(高祖父)인 익정공(翼正公 : 尹堦 목사의 시호) 부군께서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
당시의 재상에게 배척되어 임자(壬子 : 1672년. 현종13) 2월에 이 땅에 부임하였다가 6월에 떠났다.
백성들이 오래도록 그를 회상하여 오다가 35년이 지난 병술(丙戌 : 1706년. 숙종32)에 비석을 세워 송덕을 추모하였는데,
이런 사실이 관풍안(觀風案 : 제주목사 명단을 기록한 책)에 실렸었다.
그 후 을유(乙酉 : 1765년. 영조 41)에 제가 외람 되게 선조의 뒤를 이어 부임해 와서 곧 관풍안을 살펴보고 물었다.
지방민들은 오히려 유애비(遺愛碑)를 말해야 옳다 하기에 그 비를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아마도 꼭 헐고 부서져서 민가의 담장이나 초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돌을 다듬어서 거듭 새기고 다음 해 봄에 이를 동성 모퉁이에 세웠다.
없어진 비를 처음 세운지 마침 환갑이 돌아왔으니 또한 기이하도다.
아아, 사소한 지방 고을의 공적이 부군(府君)을 회고하는 일이 되다니.....
하물며 이 한 조각의 돌의 유무로 어찌 경중(輕重)을 삼아 탓하겠는가.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제가 흠모하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자 하면서도 이어받은 군사일을 기피하지는 않았으며,
고을 백성들과 선비들에게 죄를 짓지 않았으니, 오직 비(碑라)는 것은 길 다니며 바라보는 것임을 양해하리라.
숭정(崇禎)후 세 번째 병술(丙戌 : 1766년. 영조 42) 2월 현손 통정대부행제주목사 시동(蓍東 : 윤계 목사의 4대손)이 삼가 글을 짓다.
※ 윤계 목사겸절제사는 1672년(현종 13) 5월에 부임하고 같은해 10월에 떠났다.
윤계는 도임하면서 한학과(漢學科)를 개설, 본도 출신 생도 수십명을 선발하여 노걸대(老乞大)․
첩해신어(捷解新語) 등을 학습시켜, 중국어 통역관을 양성하여 외국인과의 언어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또 의국(醫局)을 설치하여 도민에게 보건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갖게 하였다.
이 무렵 불량배들이 행패가 심하고 도적질을 함부로 하므로 괴수 8명을 체포, 극형에 처했더니
조정에서 지나친 형벌이라 하여 부임 5개월만에 잡혀갔다.
그러나 불량배의 소탕으로 사회가 안정되자 도민들이 윤계의 유임을 진정하였으나, 조정에서 윤허하지 않았다.
[건입동 동문로 동북쪽 골목포장시 출토되어 자연사박물관에 보관하다 2003년 2월 현 위치로 이설]
(舊)제주시청사 발굴조사 주춧돌
제주 관덕정 서쪽으로 약30m(삼도2동 1022-3번지 일원)에 위치한(舊)제주시청사 발굴조사(시굴: 2013.3.28~3.29, 발굴: 2013.4.4~4.22)에서 (舊)제주면사무소를 포함하는
근대건물지 2동과 현대건물지인 (舊)제주시청부지(본관 1동, 부속건물 7동)가 조사되었다.
(舊)제주시청사 부지는 조선시대 사창(司倉), 진휼창(賑恤倉) 등 주로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일제 때는 이곳에 제주면사무소가 자리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제주시청이 자리했었다.
조사결과 출토된 기단석렬의 경우 일제시대에 재배치된 것으로 판단되나
내부의 초석 일부는 조선시대 기존 건물지의 것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에서 나온 기단석과 초석 등 각종 건물의 석재 부재들은 2013년 5월 이곳, 제주목 관아로 옮겼다.
공신정(拱辰亭) 주춧돌
공신정 터(일도2동 1184번지 일원, 옛 제주중앙감리교회 터)에제주기상청 신축이전이 추진되면서 2013년 12월 공신정 터 시굴조사가 추진되었다.
공신정은 원래 1652년(효종 3) 제주성 북수구 위에 초루로 지어졌으나,
산지천의 홍수로 인해 1831년(순조 31) 지금의 제주기상청 부지로 옮겨져 1904년 마지막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일제시대 제주측후소 부지가 되었다가 제주신사(濟州神社)를 조성하면서 완전히 훼철되었다.
공신정은 전면. 측면 각각 3칸의 정자로 북두성을 바라보며 세운(世運)을 기원하는 곳이자
목사와 관리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또는 외래객의 접대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시굴조사 결과 확인된 주춧돌과 최근 산재되어 출처가 파악된 공신정 주춧돌 6기를 제주목관아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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