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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 대정성지(天主敎 大靜聖地) - 故 정난주마리아묘
    국내 나들이/제주도(濟州道) 2016. 7. 4. 05:44

    천주교 대정성지(天主敎 大靜聖地) - 故 정난주마리아묘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마리아)는 1773년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맏형인 정약현과

    한국 천주교 신앙의 선조인 이벽의 손위 누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명련 이라 불렀으나 자라면서 너무 총명하므로 이름을 "난주"라고 바꿨다고 한다.

    정난주(마리아) 보다 두 살 아래인 황사영은 1775년에 서울의 아현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790년 무렵 정난주(마리아)와 혼인하였고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특히 시(詩)에서 일등을 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백지 3권, 붓 세 자루, 먹 세 개’를 상으로 받기까지 하였다.
    그 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게 되었으며, 이승훈·정약종(아오스딩) 등에게 교리를 배운 뒤 영세 입교하였다.

    그리고는 과거 공부까지 폐기한 채 오로지 전교 활동에만 힘쓰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신

    주문모 신부님을 도왔고, 자신의 집을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하나로 사용하였다.

     결과 아현의 집에는 자연히 신자들이 자주 모이면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정난주(마리아)가 이 공동체를 뒷바라지하게 되었다.

    그 후 정난주(마리아)는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때 황사영은 교회 재건을 위해 몸을 숨기기로 작정하고 1801년 2월 15일 서울을 떠났으며,

    2월 그믐부터 9월 29일 베론에서 체포될 때까지 은거 생활을 하면서 <백서>를 작성하였다.

    나머지 가족들은 2월 10일경에 이미 체포되었다.

    9월 29일 황사영이 베론에서 체포되고 <백서>가 압수되면서 조정에서는 이를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다루었고,

    11월 5일에는 그에게 능지처사(陵遲處死)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 11월 7일에는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모두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모친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부인 정난주(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고,

    아들 경한은 두 살이어서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형률을 받을 나이가 안되었기 때문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되었다.

    당시 제주도는 유배지 중에서도 가장 먼 곳이었다.

    정난주(마리아)는 대정현의 김상집(金尙集)씨 집에서 쓰라린 귀양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김상집은 당시 여덟 살이었고, 그의 부친 김석구(金錫九)씨가 당시 대정 현감의 고문 격으로 동헌 뒷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정난주(마리아)는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고 품행이 단정하며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기에,

    동네 사람들이 그를 서울 아주머니라 부르며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렇게 3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 1838년 2월 1일(음) 정난주(마리아)가 돌아가시자

    김상집씨와 동네 사람들이 그를 이곳 양지바른 곳에 묻어줬다.

    유배 이후 정난주(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에 제주 본당 제2대 주임이신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정난주(마리아)와 아들 경한에 관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라크루 신부는, 한국 선교사로 있다가 파리 외방전교회 교수 신부로 임명되어 귀국해 있던

    샤르즈뵈프(E. Chargedoeuf. 宋德望) 신부에게 1909년 10월 5일에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과 황경한의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 사실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리옹에서 발간되던 전교지 <미션 가톨릭>에 소개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의 후원자들이 라크루 신부에게 480프랑을 보내 주었으며, 라크루 신부는 이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밭을 사주었으며 정난주(마리아)가 유배 생활 중에 아들 경한에게 보낸 서한을 얻어 볼 수 있었다.

    이후 60여 년이 지난 1970년도에 대구의 교회사가 김구정(이냐시오)씨가 대구에서 우연히

    황사영의 4대손 황찬수씨를 만나 그로부터 창원 황씨 족보와 가첩, 서한 등을 받아 검토하게 되었고,

    황찬수씨가 소장해 오던 대정 사람 김상집씨의 1838년 서한 2통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어 김구정씨는 1973년 초 모슬포 본당에 재임하던 김병준(요한)신부님에게 자신이 황찬수에게 들은

    여러 사실들을 확인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마침내 정난주(마리아)의 무덤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1973년 6월 10일 김구정씨는 제주를 방문하여 김병준(요한)신부님과 함께 정난주(마리아)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그 후 김구정씨는 추자도를 방문하여 황경한의 후손인 황이정(黃利正)을 만났고 예초리에 있는 황경한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1973년 당시 황경한이 분가하여 살던 추자도의 옛 집에는 5대손 황인수(黃寅壽)가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황경한이 성장한 오씨네 집은 1965년 가을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는데,

    이때 황경한의 출생 연도와 이름 등이 적혀 있던 배냇저고리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1982년 3월에는 제주교구 사목국장 김창훈(다니엘)신부님과 관리국장 이태수(미카엘)신부님이 의사 김태인(루까)과

    시신 확인자 2명을 대동하고 파묘를 한 결과, 무덤 주인은 여성이고, 관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하층민의 무덤

    즉, 전승과 편지의 내용대로 정난주(마리아)의 묘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는 1990년에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대정 성지 일대의 부지 2,130평을 매입한 뒤

    정난주(마리아)의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여 1994년 9월 25일 교구장 김창렬(바오로) 주교님의 집전으로

    순교자 현양대회 겸 봉헌식을 가졌으며, 정난주(마리아)의 순교자적 삶을 천주교 신자들의 모범으로 삼고자 성지로 선포하였고,

    현재 많은 도 내외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을 참배하고 있다.

    아울러 제주교구에서는 1999년 3월 9일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무덤 주변의 임야 600여 평을 매입하여

    공원 묘역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김병준 요한 신부님은 2001년 선종 하셨다)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247번길 102 (동일리)









































    제주에 뿌린 신앙의 씨앗, 정난주 마리아


    '정난주(丁蘭珠, 마리아, 1773∼1838)'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된 황사영의 부인이다.

    그녀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정씨 집안에서 정약현(정약종과 정약용의 큰형)의 장녀로 태어났다.

    정난주는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에 황사영(알렉시오)과 혼인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어야 했다.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에 은거하면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장문의 보고 서한인 '백서(帛書)'를 작성하였다.

    1801년 9월29일 황사영이 배론에서 체포되고 '백서'가 입수되면서

    조정에서는 이를 대역부도죄(大逆部道罪)로 다루어 그에게 능지처사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서 부인 정난주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모두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정난주는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37년 동안 관비(官婢)로 제주도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그녀를 양모처럼 봉양하던 김상집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한굴왓에 안장하였다.

    제주의 천주교 신자들은 정난주 마리아를 '신앙의 증인'으로 섬기고 있다.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정마리아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다.

    그녀는 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丁若鉉)과 경주 본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명연(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 약전(若銓), 약용(若鏞)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이벽(李壁)의 누이였다.

    황사영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 옥동자 경한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약관 16세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신앙함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을 다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 백서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동년 음력 11월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처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마리아는 1801년 음력11월21일 두살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자도에 이르러 어린 아들과 생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은 어부 오씨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그 후순은 현재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

    제주목 관노로 정배된 정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력 2월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정마리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 증거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면서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묘역을 새로 단장, 성역화 하였다.

    그녀의 삶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새로운 결단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영원하고도 소중한 표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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