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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 궁남지(扶餘 宮南池, 마래방죽) - 사적 제135호
    국내 나들이/호수,저수지(湖水,貯水池) 2016. 8. 28. 04:30

    부여 궁남지(扶餘 宮南池, 마래방죽) - 사적 제135


    백제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으로, 삼국사기에 의해서 궁남지(宮南池)라고 부른다.

    다만 연못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우물과 몇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동쪽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건물터가 확인된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하였다.

    한편삼국유사기이제2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연못 주변은 농지로 이용되었으며, 현재 연못의 규모는 1만평도 채 안 되는 형편이다.

    연못은 자연 지형의 곡선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의 가운데와 물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고, 연못 주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연못 속의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섬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섬인 봉래(蓬萊방장·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하여,

    그 섬 가운데 방장선산을 본따서 신선정원(神仙庭苑)을 꾸며 불로장생을 바랐던 도교적 사상과 관념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궁남지 동쪽의 화지산(花枝山) 서쪽 기슭에는 궁남지쪽으로 향한 완만한 경사지에

    대리석으로 만든 8각형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이곳은 사비정궁(泗沘正宮)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이궁(離宮)터로 추정된다.

    따라서 궁남지는 이궁의 궁원지(宮苑池)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궁남지는 19651967년에 연못 바닥을 준설하고, 가장자리의 언덕에 흙을 쌓고서, 수양버들을 심어 조성하였다.

    전체 면적은 13,000평 정도이지만, 발굴조사 결과 원래 규모는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01993, 1995년에 발굴조사가 시행되어 궁남지 내부 및 주변에서

    나무 및 차지고 끈끈한 흙인 점질층으로 만들어진 집수시설, 수로, 건물터 등이 조사되었다.

    집수시설은 동서 길이 11.65, 남북 너비 3.13인데, 가장자리를 따라 통나무를 2중으로 박아 벽체로 쌓은 모습이다.

    집수시설과 가까운 동쪽 바깥쪽에는 도수로가 남북 방향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곳을 거쳐 집수시설로 물을 끌어드리도록 하였다.

    집수시설 안의 서쪽 부분은 6.3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고,

    동쪽 부분에는 수로에서 유입된 물을 흘러 보낼 수 있도록 얕은 자형 홈이 나 있다.

    수로는 인공물을 설치하지 않은 자연형 수로와 옆면에 말목을 박고 나무를 횡으로 걸친 인공형 수로가 연결된 모습이다.

    수로에서는 서부후항사달사사정의활□□□정귀인중구사하구이매라성법리원수전오형

    (西部後巷巳達巳斯丁依活□□□丁歸人中口四下口二邁羅城法利源水田五形)”,

    서부중부이(西部中部夷)”로 판독되는 백제 목간 1점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길이 35로 소나무로 제작되었는데,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확인되는 영조척(營造尺)35.05인 것과 부합하여, 백제 도량형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목간에 서부후항(西部後巷)’중구(中口)’, ‘하구(下口)’ 등의 행정구역명이 기록되어 있어,

    문헌에서만 확인되었던 후항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5부와 5항을 두었다는 백제 행정체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 외에도 수로 안에서는 여러 점의 나무 삽과 가래, 베틀의 구성품인 목제 비경이,

    부들로 제작된 짚신, 사람의 족적(足跡) 등 당시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출토되었다.

    궁남지는 현재 알려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궁원지(宮苑池), 조성 기록이 명확히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조경기술과 도교문화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궁남지의 조경기술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확인되듯이 일본에 알려져 일본 원지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한다.

    궁남지는 규모와 정확한 구조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동아시아 원지 조경사 연구의 표준 유적이 될 것이라 기대된다.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






    포룡정(抱龍亭)


    포룡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궁남지를 복원하면서 조선시대 양식으로 지는 건축물이다.

    포룡정 현판은 이곳 부여 출신인 김종필 국무총리의 글씨이다.











































    () 설명


     다년생식물로 전국 각지의 연못 등에 분포되어 있고, 7~8월에 연한 홍, , 노랑색 등의 꽃이 핀다.


    수련

    다념생 식물로 전국 각지의 민가나 공원연못 등에 분포되어 있고 6~8월에 백색, 홍색, 적색 등으로 꽃이 피며,

    밤에 오므라들고 낮에 피기 때문에 자오련(子午蓮)이라고도 하며, 밤에 피는 야개수련 등이 있다.


    가시연

     한해살이풀로 못이나 늪에서 자란다. 잎의 지름은 20~200cm이며, 7~8월에 가시 돋친 꽃자루 끝에 자주색 꽃이 핀다.


    왜개연

    여러해살이풀로 개천, 못 등에 분포되어 있으며,7~9월에 긴꽃자루 끝에 노란색 꽃이 핀다.


    물양귀비

    여러해살이풀로 줄기가 수중 땅속이나 수중으로 뻗어가며 마디마다 가지가 나고, 그 가지 끝에 연한 노란색 꽃이 핀다.


    기타

    노랑어리연, 순채, 개연, 애기수련, 택사, 낙지다리, 흑삼능, 물질경이, 물채송화, 부레옥잠, 자라풀 등이 식재되어 있다.



    서동(薯童)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백제시대 이궁터로 알려진 궁남지 일대에는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했던 무완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사비시대에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장()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궁궐 밖의 생활이 궁핍하였으므로 생계유지를 위해 그는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 되었던 것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궁중에서 한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하였는데 신라의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는 것이었다.

    서동은 기꺼이 받아들여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 탐지활동을 충실히 수행에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서로는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트리기로 다짐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나라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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