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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생태미술체험관 풀잎
    수원사랑/이모저모 2017. 6. 19. 05:30

    수원 어린이생태미술체험관 풀잎

     

    생태미술은 자연의 재료를 활용한 작품뿐 아니라,

    자연에서 관찰하거나 느낀 점을 표현한 작품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 보다는 환경의 소중함을 알리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생태미술의 역할이다.

    어린이생태미술체험관 풀잎은 자연과 예술이 결합한 전시를 바탕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전시 학습 공간이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어린이생태미술체험관 풀잎은 2011년 수원미술전시관의 분관으로 문을 열었다.

    자연과 예술을 오감으로 체득하는 전시 학습 공간을 지향한다.

    아이들에게 예술과 자연이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좋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수대로 1274 (파장동)

     

     

     

     

     

     

     

     

     

     

    코뿔소(임종욱, 2011년)

    90cm × 175 cm× 130cm

     

     

     

    사슴(임종욱, 2011년)

    145cm × 75cm × 170cm 스테인리스 스틸

     

     

     

    산양 (임종욱, 2011년)

    140cm× 90cm× 90cm 스테인리스 스틸

     

     

     

    고래가 될 프로젝트 (엄아롱, 2014년)

    레코드판, 지역에서 수비한 오브제, 가변설치

     

     

     

    Dream of them - bull2 (이송준, 2014년)

    스테인리스 그릇, 240cm × 140cm × 140cm

     

     

     

    Dream of them - elephant (이송준, 2012년)

    스테인리스그릇 , 270cm × 130cm ×  170cm

     

     

     

     

     

    거위

     

    거위는 야생 기러기를 길들여 집에서 기르게 된 오리과의 물새이다.

    우리말로는 거유 · 게오 · 게우로 불리었으며, 한자로는 아()가 표준어로서

    가안(家雁) · 서안(舒雁) · 우군(右軍) · () · 역월(逆月)로도 불리었다. 학명은 Anser cygnoides var. orientalis L.이다.

    거위는 원래 중국에서 개리를 가금화(家禽化)한 것인데,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820년에 신라아(新羅鵞)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에서는 약 1,500년 전에 거위를 길렀다고 하니 우리 조상들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기르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야생인 개리와 비슷한 색깔에서 백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의 품종이 있는데, 날지는 못한다.

     

     

     

     

     

    정조대왕상(正祖大王像)

     

    정조(1752~1800)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7~1800)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1735~1762)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1735~1815)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 1753~1821)이다.

    1759(영조 35)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에 장헌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자

    조세(早世)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이듬해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사망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정조는 사망하기 2년 전인 1798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무척 길고도 독특한 호였다.

    여기에서 정조가 말한 그 속에 담긴 은미한 뜻이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특히 다른 호와는 달리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에 담은 자신의 간절한 뜻과 의지를

    조정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즉위 후 규장각을 설치하고 신진 학자들을 등용하고 다양한 서적을 간행했다.

    정치적으로는 인물 위주로 등용하는 준론탕평책을 펼쳐 사림 붕당세력의 선택이 아니라 관료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전제 개혁 등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고 장용영을 설치해 북학파를 중시해 재화를 늘리도록 했다.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해나갔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즉위1759(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洪麟漢)"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에 따라 즉위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 했다.

     

    가엾게 돌아간 아버지의 넋을 달래고 영원한 복을 빌기 위하여

     

    수원 백여리 길을 수없이 오고갔던 정조임금의 효성 앞에 머리 숙이자

     

    그리고 우리 모두 그 효성을 본받아 실천에 옮길 것을 다짐하자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필로(蹕路)’

     

    필로는 거동할 때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임금의 수레가 지나가던 길을 말하는데,

    정조는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길에 지지대고개(遲遲臺峴)에서부터 현륭원(顯隆園)까지

    18개의 표석과 11곳에 또 다른 이정표로 장승을 세웠다.

    효행길(정조대왕능행차길)을 따라가다 보면 괴목정교(槐木亭橋) 표석(복제본, 원본은 수원박물관에 있다.),

    수원미술전시관 앞에 있는 만석거(萬石渠) 표석(원본은 분실, 최근에 다시 세움),

    정조사거리 부근의 상류천(上柳川) 표석(최초 위치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 원본),

    세류역 입구 왼쪽에 보면 하류천(下柳川) 표석(복제본)을 만날 수 있다.

     

    최초 설치하였던 위치는 다음과 같다.

    1. 지지대고개(遲遲臺峴) 장승 2. 괴목정교(槐木亭橋) 표석 3. 일용리(日用里) 장승 4. 여의교(如意橋) 표석

    5. 만석거(萬石渠) 표석 6. 기하동(芰荷洞) 장승 7. 대유평(大有坪) 표석 8. 영화역(迎華驛) 표석

    9. 관길야(觀吉野) 표석 10. 장안문(長安門) 표석 11. 행궁(行宮)표석 12. 팔달문(八達門) 표석

    13. 매교(梅橋) 표석 14. 상류천(上柳川) 표석과 장승 15.만화현(萬和峴) 장승 16. 건장동(建章洞) 장승

    17. 하류천(下柳川) 장승 18. 황교(皇橋) 표석 19. 옹봉(甕峯) 표석과 장승 20. 대황교(大皇橋) 표석.

    21. 능원소화소(陵園所火巢) 표석 22. 유첨현(賜瞻峴) 표석과 장승 23. 안녕리(安寧里) 표석과 장승

    24. 유근교(賜覲橋) 표석 25. 만년제(萬年堤) 표석 26. 능원소동구(陵園所洞口) 장승

     

    출처 :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

     

     

     

    자연과 역사를 품은 이야기 길 - 수원팔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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