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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사 이시백 선정비(府使 李時白 善政碑)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7. 7. 2. 21:30

    부사 이시백 선정비(府使 李時白 善政碑)

     

    이시백(1581~1660)은 효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이다.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녹훈되었다.

    1624(인조 2)부터 1629년까지 수원도호부 부사로 재임하였다.

    인조와 효종대에 여러 판서와 좌참찬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수원박물관

     

     

     

     

     

     

    이시백(李時白)

     

    이시백(1581~1660)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란()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안현(鞍峴)에서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했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했다.

    1633년 병조참판,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맞이했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고,

    다음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했다.

    1638년 병조판서 때, 척화신(斥和臣, 병자호란 때 중국 청나라와의 화친을 배척하는 신하를 이르던 말)으로서

    청의 강압에 못 이겨 심양(瀋陽)에 아들 유() 대신 서자를 볼모로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 유형으로 지정장소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던 형벌)되었다.

    다음해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고,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와 중신들은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의 효종)을 세자로 삼을 것을 희망했으나,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16495월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 좌참찬이 되고, 1650(효종 1)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우 시방이 그와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1652년 사은사(謝恩使, 고마운 일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수시로 보내던 사신)로 청나라를 다녀와

    언사(言事, 나랏일에 관한 상소)로 견책을 받은 조석윤(趙錫胤) 등을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누명을 벗겨 남을 구원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 김육(金堉, 1580~1658)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다.

    다음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수원에 능을 정하자고 건의했으나,

    그가 교통이 빈번해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했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청빈해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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