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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김대건신부 순교 기념탑(聖 金大建神父 殉敎 記念塔)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8. 7. 13. 21:30


    성 김대건신부 순교 기념탑(聖 金大建神父 殉敎 記念塔)


    화산(華山) 정상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 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운 것이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18451012일 나바위(羅岩)에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다음해인 1846514일 서해 해로를 통해 최양업과 이 메스트로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연평도 조기잡이배에 접근해서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옹진, 해주감옥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정은 강경한 쇄국정치를 주장하며 김대건신부를 통외(通外)의 위험분자로 몰아서 마침내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내렸다.

    1846916일 한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서울 성 밖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참수 치명했다.

    김대건 신부는 처형을 받기에 앞서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주를 믿으시오!”라고 믿음과 신념에 찬 말을 외치고 외연하게 순교의 피를 흘렸다.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나바위 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1012일 밤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고 페레올 주교님과 안 다블뤼(Daveluy)신부님 그리고 11명의 조선교우들과 첫발을 내디디신 곳이다.

    김대건신부는 18218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김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 가문이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가 7살이었다.

    김대건의 부친은 1839년 기해박해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순교성인이시다.

    김대건이 첫영성체를 한 것은 18361월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나 신부님에 의해서였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게 된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소망은 겨레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너무나도 거룩하고 원대한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은 7월에 서울로 올라와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 바오로, 현석문 가롤로, 조신철 가롤로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의 교우들과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 소년은 18376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함께 갔던 최방제가 1년만에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조국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님이 순교하게 된다.

    모방(Maubant) 나 신부님과 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

    그리고 정하상 , 유진길, 조신철 한국교회의 지도급 교우들이 순교하는 대박해였다.

    조선은 또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어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김대건은 1844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선임된 고주교님에게 1215일에 부제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선영입을 위해 18451월 김대건은 의주쪽으로 어렵게 혼자 입국하는데 성공한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주교님을 맞아 들여야 하는 중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이 육로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작은 배 한 척을 사서 현석문 가롤로 등 11명의 교우들과 상해로 돌아간다.

    그리고 1845817일 상해에서 20리쯤 떨어진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으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된다. 한국교회창립 61년만의 일이었다.

    831일 김대건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라파엘호'라고 이름을 붙인 작은 어선을 타고 조선을 향해 출발한다.

    라파엘호가 처음에는 요동방면으로 가는 중국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물결이 치는대로 배를 맡기게 되었다.

    928일 라파엘호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된다.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나바위에 상륙하게 된다.

    9년만에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과, 꿈에도 그리워하며 6년을 포교지를 향해 준비한 페레올 주교님은

    감사의 기도로 나바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18451012일 밤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 나바위에 첫발을 디딘 것은 상해를 떠난 지 바닷길 42일만의 일이었다.

    바로 이 세 분 성직자들의 거룩한 첫마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나바위 성지이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탑


    1955년 김대건 신부 시복 30주년을 맞아 나바위 본당 신자들이 헌금과 협심으로 세운 기념탑이다.

    탑의 크기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타고 온 길이 25, 넓이 9, 깊이 7자의

    라파엘호(하느님이 보호하신다는 뜻으로 페레올 주교님이 명명한 목선 돛배)를 연상하여 암반 위에 제작하였다.

    탑에 사용한 돌은 신자들이 화산 서쪽 기슭에 있던 큰 암석을 깨어 목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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