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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초 홍명희 문학비(碧初 洪命憙 文學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8. 12. 28. 18:47


    벽초 홍명희 문학비(碧初 洪命憙 文學碑)


    임꺽정(林巨正)’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서민 문학의 정수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


    홍명희는 충청도 괴산군 괴산읍 인산리에서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이조 판서를, 조부는 참판을 지낸 바 있으며, 아버지는 경술년에 국치를 당하자 자결한 홍범식(洪範植)이다.

    이 풍산 홍씨 문중은 자체로 문고를 이룰 만큼 많은 저술을 남긴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문학가로는 한중록의 혜경궁 홍씨, 순오지등 비평적 업적을 많이 남긴 홍만종,

    그리고 바로 임꺽정의 홍명희를 꼽을 수 있다.

    홍명희는 두 살 나던 해에 어머니가 병사한 뒤 증조모와 대고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다.

    어릴 적에 한학을 익힌 그는 일곱 살 때부터 한시를 지으며, 삼국지등의 중국 소설을 섭렵한다.

    열두 살이던 1900, 홍명희는 을사조약 직후 자결한 민영환과 재종 관계인 민영만의 딸과 결혼한다.

    이 부부는 매우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남편 홍명희는 당시의 가장들이 일반적으로 몹시 근엄했던 것과는 달리,

    자제들이 보는 앞에서까지도 부인을 아끼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으며,

    개화기 이후 많은 지식인이 조혼한 부인을 버리고 신여성과 사귀어 재혼하던 풍속과 달리 두 사람은 평생을 해로한다.

    홍명희는 열네 살께 서울 중교의숙(中橋義塾)에 입학해 다소 늦게 신학문을 접한다.

    1903년에 장남 기문을 얻는데, 이 때 아버지인 그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기문의 할아버지 또한 서른두 살 젊은이였다.

    홍명희 스스로 망발로 형제와 같은 부자라고 말할 만큼 그는 뒷날 아들과 줄곧 동지 또는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다.

    두 사람은 부자 사이에 담배도 마주 피우고 술도 같이 마셔서 한동안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한다.

    열여덟 살 때 그는 일본으로 가서 중학교 진학을 준비한다.

    여느 유학생들이 속성으로 간판을 따곤 했지만, 일본말을 철저하게 배우고 신학문을 기초부터 다지기 위해 준비 기간을 가진 것이다.

    1907년 그는 다이세이(大成)중학 3학년에 편입해 1910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

    이 무렵 일본과 서양의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되는데, 특히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독서에 매달린다.

    그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한 책을 보는 동안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 되도록 속히 읽는다.”

    자신의 독서법을 지키며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과 바이런의 시, 자연주의 계열의 일본 작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금서로 분류된 좌파 사상가들의 저술과 풍기 문란 딱지가 붙은 책도 가리지 않고 섭렵한다.

    그가 이광수 · 최남선 등과 만나 교유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 세 사람을 동경 유학생 중 삼재사(三才士)”, “조선 삼재”, “조선 문학을 창조한 세 분이라고 일컫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인 셈이다.

    1910년 스물두 살 나이의 홍명희는 갑자기 귀국길에 오른다.

    유학 시대를 회고한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루한 인습의 굴레를 답답하게 느낀 나머지

     후레자식 구락부를 생각해낼 만큼 그의 내면에서는 주체할 길 없는 반항 정신이 뻗쳐오른다.

    이런 그가 민족 차별이 따르던 일본 유학에 회의를 느끼고 귀국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 무렵 홍명희는 금산 군수였던 아버지가 1910년 경술 국치에 비분 강개해 자결하는 엄청난 사건과 맞닥뜨린다.

    홍명희는 아버지가 남긴 이 유언을 액자에 끼워서 책상 앞의 벽에 걸어놓고 평생 이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는 말은 그의 이런 마음가짐을 잘 나타낸다.

    3년상을 치르고 나서 홍명희는 1913년에 집을 떠나 만주 · 베이징 · 상하이 · 난양 등지를 떠돈다.

    이 때 중국에 망명중이던 신채호 · 정인보 등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들의 자주 독립 사상에 감화받고 떠난 지 6년 만에 돌아온다.

    19193·1운동에 앞장선 그는 1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1920년 만기 출소한 그는 쇠약한 몸으로 집안 형편이 기운 데 따른 생활고와 셋째아들 기하의 죽음까지 겪는다.

    그러다가 1923년 좌익 사상 단체인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해 간부로 활동하며,

    1924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거쳐 1927시대일보의 사장을 지내는 등 언론계에 종사한다.

    동아일보에 있을 당시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쪽이 문학 분야다.

    192412동아일보2천 원이라는 거금을 걸고 춘향전을 현대 소설의 수법으로 개작한 작품을 공모한다.

    19251월에는 우리 신문 사상 최초로 신춘 문예 제도를 실시, 한국 문학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다.

    얼마 뒤 시대일보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자

    그는 휘문고보 · 오산중학 · 경신고보 · 연희전문 · 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 교직 생활을 하는 한편,

    19261월 카프의 기관지 문예운동창간호에 신흥 문예의 운동, 2호에 예술 기원론의 일절을 발표한다.

    아울러 그는 신간회창립 때 발기인으로 적극 참여한다.

    신간회는 1927년 홍명희를 비롯해 문일평 · 신채호 · 안재홍 · 한용운 등 28인의 이름으로 창립이 공포된다.

    신간회의 강령과 규약 등은 홍명희의 지시로 제정되며, 신간회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도 그다.

    처음에는 신한회라고 하나 총독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으로 바꾸어 신간회가 된다.

    신간회 부회장을 맡은 홍명희는 19281120조선일보임꺽정을 연재한다.

    1928년에서 1940년 사이에 임꺽정은 몇 번이나 연재가 중단된다.

    이 가운데 한 번은 홍명희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 사건에 연루,

    다른 신간회 간부들과 함께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이다.

    연재가 중단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신문사에서는 경찰과 교섭해

    유치장 안에 책상과 원고지를 마련해주어 작가에게 소설을 계속 집필하게 한다.

    이로써 임꺽정은 중단 11일 만에 다시 이어진다.

    물론 이런 상태로 집필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어서, 홍명희는 3년 남짓 옥고를 치르고 나와 193212월부터 다시 연재를 시작한다.

    이후에도 몇 차례 연재 중단과 집필 재개가 이어지다가 194010조선 초유의 대작이자

    조선 현대 문학의 거탑이라는 찬사를 듣던 대하 역사 소설 임꺽정은 미완성인 채로 막을 내린다.

    해방 직후 홍명희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정치 운동에도 나서 1947년 그는 중도 좌파에 속하는 민주독립당의 결성을 주도, 지도자가 된다.

    이미 몇 차례에 걸쳐 평양행을 감행한 바 있던 그는 1948년 남북 연석 회의를 계기로 당원들을 이끌고 월북한다.

    이런 결정은 그가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컸다.

    , 제거되어야 마땅할 친일 세력이 오히려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하는 남한의 정국을 홍명희로서는 그냥 보아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월북 뒤 그는 부수상과 과학원장 등을 역임하며 임화와 김남천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인이 숙청의 비운을 맞는 가운데서도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는다.

    벽초 홍명희는 1968년 여든 살을 일기로 숨진다. 그의 무덤은 북한의 혁명 열사릉에 있으며,

    빗돌에는 홍명희 동지 내각 부수상 188873일생 196835일 서거라는 간단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홍명희 문학비 후면(洪命憙 文學碑 後面)


    근대민족문학사의 큰 봉우리 벽초 홍명희(1888~1968)

    경술국치 때 순국한 홍범식 의사(義士)의 아들로 충북 괴산 인산리(동부리 450-1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3·1 운동 때 괴산에서 충북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른 후에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하여 민족적 저항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임꺽정(林巨正)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다.

    그는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북한으로 넘어 간 후 남한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1950년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재임할 당시 6·25라는 민족상잔이 있었으며 1968년 북한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 전체의 비극이자 고통스런 역사이며 눈물이요 아픔이다.

    그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이곳 괴산은 민족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민족이 진정 하나가 되는 날을 소망하면서 여기 그의 고향 땅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임형택·강영주·김승환·라용찬)

    119981017일 제2200010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

     

    문학비는 1998101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가 세웠으나 괴산지역 보훈단체의 반발로 비문을 철거했다가

    일부 문구를 수정해 2000107일 제5회 홍명희문학제 때 다시 제작해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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