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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주성 수성비(洪州城 修城碑) 및 홍주성 비석군(洪州城 碑石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8. 12. 7. 18:19

    홍주성 수성비(洪州城 修城碑) 및 홍주성 비석군(洪州城 碑石群)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 -


    이 비는 1824(순조 24) 황페된 홍주읍성 보수 완공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본래 홍주읍성 조양문 앞에 있었다.

    비문에는 성의 축조과정을 적고 있다. 홍주 지역은 바닷가에 있어서 서울의 서남쪽의 방비를 위한 중요한 지역이다.

    홍주성은 조선시대 문종 1(1451)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쌓아 놓은 곳으로,

    민종식, 이세영, 채광묵, 안병찬 등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켜

    이곳에 와서 성에 머물러 있던 일본군을 덕산으로 쫓아내 성을 되찾았던 전투로 유명하다.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1823(순조 23) 봄에 부임한 진장(鎭將) 김계묵(金啓默)

    목사(牧使) 이헌규(李憲圭)가 수리하기로 하고,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

    완성된 성의 규모는 7()이고, 일을 한 날이 100여일 이었다.

    비의 뒷면에는 성쌓기 작업을 주도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홍주성역사공원




    修城紀蹟碑(수성기적비)




    觀察使沈宜臣永世不忘碑(관찰사심의신영세불망비)


    심의신(沈宜臣, 1791~ 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순흠(舜欽),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출생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심구(沈銶)이고, 조부는 심건지(沈健之)이며,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안동진관병마동첨절제사(安東鎭管兵馬同僉節制使) 심능술(沈能述)이고,

    생부는 통훈대부 해주진병마절제도위(海州鎭兵馬節制都尉) 심능악(沈能岳)이다.

    외조부는 참판(參判) 김이희(金履禧)이고, 처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민명혁(閔命爀)이다.

    동생으로 심의린(沈宜隣)이 있다. 1810(순조 10) 식년시 진사 3등에 23위로 합격하였으며,

    1829(순조 29) 정시 병과에 26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이조참판(吏曹參判)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829(순조 29) 중궁전승후관(中宮殿承候官)으로서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1837(헌종 3)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충청 지역을 진휼(賑恤)한 후 장계(狀啓)를 올렸다.

    같은 해에 비밀리에 장계를 올려 대흥군(大興郡)의 괘서(掛書) 사건에 관련된 성국로(成國老)이종려(李鍾呂) 등을

    조정에서 국문(鞠問)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일이 커지는 것을 반대하던 대왕대비의 저지로 금부도사(禁府都事)의 입회하에

    성국로와 이종려는 도신(道臣)이 직접 참형(斬刑)으로 다스려졌다.  




    縣監尹敬龍淸德善政碑(현감윤경룡청덕선정비)




    縣監洪錫輔淸德善政碑(현감홍석보청덕선정비)




    牧使洪耆燮善政碑(목사홍기섭선정비)




    牧使慶暹善政碑(목사경섬선정비)




    牧使金熙臣去思碑(목사김희신거사비)




    牧使尹東源淸德愛民永世不忘碑(목사윤동원청덕애민영세불망비)




    牧使柳誼淸白善政碑(목사유의청백선정비)




    牧使卞時益淸簡善政碑(목사변시익청감선정비)




    홍주성 비석군(洪州城 碑石群)


    홍주성 비석군은 본래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 밖과 금마총 주변에 있었다.

    이후 주변이 개발되면서 조선 중, 후기에 홍주목사를 지낸 5명의 홍주목사 선정비를 각각 홍주성 안의 의병공원 부지로 옮겨졌다.

    그중 유의(柳誼, 1734~?)는 다산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홍주목사로 재직한 인물로서

    다산이 그의 검소함과 청렴결백함을 감탄하여 청백리의 표상으로 목민심서에 기록한 바 있는 인물이고,

    그 외에도 윤동원(尹東源, 1685~1741)은 윤증의 손자로 홍주목사 시절 선정을 베푼 이로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통신부사로 간 경섬(慶暹, 1562~1620),

    인조실록 편수에 참가한 변시익(卞時益, 1598~1653), 순조 때 목사를 지낸 김희신(金熙臣, ?~?) 등의 선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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