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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산 허위선생 유허비(旺山 許蔿先生 遺墟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8. 11. 16. 04:30

    왕산 허위선생 유허비(旺山 許蔿先生 遺墟碑)


    허위(許蔿, 1855~1908) 선생은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는 왕산(旺山)이다.

     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義兵將)이다.

     을미년(1895)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당하자,

    1896년 의병을 일으켜 김천(金泉) 장날을 기하여 봉기하였다.

    서울 공격을 위해 의병을 이끌고 충청도 진천(鎭川)에 이르렀을 때 고종의 밀서(의병 해산령)을 받고 자진 해산하였다.

     1899년 조정의 부름을 받은 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사임, 구금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일제가 조선을 대표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907년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 차례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908년 서울에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퇴군하였다.

    다시 서울 공격을 준비하던 중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고 경기도 영평(永平)에서 체포되었다.

     그 해 10"나라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랴/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니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랴" 라는 유서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그 일가와 후손들은 만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몸바쳐 숱한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대구달성공원에 순국기념비가 있고, 서울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의 길을 선생을 기념하여 '왕산로(旺山路)' 라고 부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왕산로 28-33 (임은동)








    왕산허위선생유허비각(旺山許蔿先生遺墟碑閣)




    왕산(旺山) 허위(許蔿)선생 유허비

     

    배달의 푸른 얼이 삼천리를 굽이쳐

    화랑의 가슴에 뛰고

    선비의 핏줄에 여울져

    이제도 여기 맥맥히 흐르고 있다.

    근세 조선 말기

    왜적이 이 땅을 짓밟아 올 때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어

    겨레의 넋을 밝히고

    뜨거운 피를 바쳐

    반만년의 기상을 살리신 분을

    여기 새기니

    이 고을이 낳은

    의병장 허위(許蔿) 선생이시다.

     






    선비의 넋은 안으로 스미어 겨레 마음의 기둥을 굳히고 밖으로 떨치어 침략자를 겨누는 매운서슬이 되나니

    왜적이 날로 그 모진 이빨을 드러내 우리의 주권을 앗아 갈 때 선생은 책을 덮고 일어섰다.

    18963월 격문을 사방에 날려 의병을 일으키고 김천을 거쳐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러나 의병의 깃발이 충청도 진천 땅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해산하라는 왕명을 받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군사를 흩었다.

    뜻을 꺽음이 아니요 나라의 법도를 살리기 위함이다. 

    다시 책 읽고 밭갈기 삼 년 안으로 조정은 더욱 병들고 밖으로 숱한 외국 세력들이 소용돌이 칠 때

    나라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나아가니 1899년이다.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참찬 등의 관직을 지내며 나라 일에 정성스럽고 공번되어 일호의 티끌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도도한 탁류 속의 한 가닥 맑은 샘이라 넘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 숨가쁜 백성을 살리기 위해

    교육진흥, 군정혁신, 수력발전, 토지개혁, 산림보호, 석탄사용 등 진실로 백년 앞을 내다보는 밝고 넓은 경륜을 내세웠다.

    그러나 기둥 하나가 받치기엔 큰 집이 너무 기울어졌다.

    왜적의 침략은 한층 심해지고 반역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니 다시 격문을 펴 그들을 꾸짖다가

    왜벽에게 잡히어 넉 달의 옥고를 치른 뒤 벼슬을 내던지니 1905년이다.

    정치가로서의 그의 포부를 펴지 못한 선생은 경상, 충청, 전라 세 땅이 맞닿는 삼도봉 밑에 숨어

    각 도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새로운 무장 투쟁의 길을 찾았다.

    1907년 나라의 심장부인 경기에서 두 번째 깃발을 들어 양주, 포천, 철원, 강화 등지를 달리며

    적과 맞서 싸웠고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묶어 연합 진용을 만들고 선생은 그 군사장(軍師長)이 되었다.

    적 침략의 거점인 이른바 통감부를 무찌르고 수도를 탈환하여 왜적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려는 작전으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진들은 약정한 시각에 닿지 못하여서 선생이 몸소 거느린 삼백의 결사대만이

    동대문 밖까지 쳐들어가 고군분투하다가 물러섰으니 나라의 아픔이요. 역사의 슬픔이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이 피 어린 길을 선생의 호를 따 왕산로(旺山路)라 정하였음은 그 구국정신을 길이 살리기 위함이다.

    다시 일어설 것을 꾀하며 경기, 강원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19086월 영평군 유동에서 왜병에게 잡히니

    하늘은 정녕 이 나라를 버리었단 말인가 적장마저도 선생의 애국심과 인품을 우러러 구명 운동을 폈지만

    그 해 921일 쉰 네 살을 일기로 서대문 옥에서 기어이 가시고 말았다.

    온 백성들의 슬픔이 사무쳐 하늘은 빛을 잃었고 삼천리의 산과 물도 노여워 울부짖었다. 

    선생은 185542일 이 고을 구미 땅 임은리에서 나시니 대대로 선비의 집안이요허조(許祚) 님의 네째 아들이다.

    의롭고 슬기로운 내림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뜻이 높고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학식과 덕망이 당대에 떨친 맏형 훈()에게 글을 배웠다.

    슬하에 학(), (), (), ()의 네 아들을 두었으니 어버이 가시고 나라 망하자

    숙부 겸()을 따라 북만주 해삼위 등지에서 광복운동에 활약하다가 모두 그 곳에서 뼈를 묻었으며

    남은 동지들도 나라 안팎에서 투쟁을 계속하여 광복의 날을 맞이하였으니 한말 구국운동은 임에서 샘솟아 그 줄기를 이루었다.

    가시고 예순 여덟 돌, 이 날을 가려 선생의 넋이 어린 금오산 자락에 높이 새겨 부르노니세기를

    앞지르는 밝은 눈으로 백성을 걱정하고삼천리를 휘덮는 매운 뜻으로 원수와 싸웠다.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니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 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뜻 금오산에 솟구치고그 장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정휘창(鄭輝昌)은 글을 짓고, 박병규(朴秉圭)는 글을 써서, 19751021일 나라에서 이 비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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