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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인 천자문(千人 千字文)
    일상생활속에서/작품속으로 2019. 3. 29. 04:30

    천인 천자문(千人 千字文)


    왕인(王仁) 박사의 업적을 기리고 박사께서 남긴 '소통과 상생'의 정신을 널리 세계평화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

    한.중,일 명사 1,000명이 육필(肉筆)로 천자문(千字文) 한자씩을 지극 정성으로 쓰고,

    이를 영암의 석공이 돌에 새겨 만든 뜻 깊은 조형물이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440 (동구림리) 왕인박사유적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배려 정신이 담긴 ()’


    영암군에서는 2007년 왕인 박사의 위업을 계승 , 발전하기 위하여

    천인천자문상징조형물 건립에 필요한 천 자를 한, , 일 세 나라 명사 1,000명에게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천자문에 나오는 첫 글자 ()’은 김대중 대통령께 청하였으나

    첫 글자는 현직 대통령이 쓰는 것이 도리라면서 ()’자를 맡겠다고 하였다.

    김 대통령의 배려에 따라 은 노무현 대통령, 두 번 째 글자인 는 김 대통령,

    마지막 글자인 ()’는 김일태 영암군수가 쓰기로 하였다.

    이듬 해 천인천자문 조형물이 완성될 즈음까지 자가 오지 않아 군청에서 수차례 청와대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바빠 쓸 시간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는 김대중 대통령께 자를 써 줄 것을 다시 요청하였다.

    김 대통령께서는 자도 어렵게 썼다며 고사했고, 영암군 조정위원회에서 자를 누구에게 부탁할지 논의하게 되었다.

    천인천자문 상징 조형물 건립은 왕인 박사의 고향인 영암군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므로

    군을 대표하는 군수와 군의회의장이 천자문의 처음과 마지막 글자를 맡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이에 따라 군수가 자를, 군의회의장이 자를 쓰게 되었다.

    자에 담긴 배려와 양보의 미덕은 우리가 더욱 소중히 보존하고 빛내야 할 자산이다  




    千人 千字文발원문


    월출산의 높은 달은

    달빛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아

    밤길을 만난 나그네의 길눈이 되어주고

    영산강의 뭇 생물과 산새들을 잠들게 하고

    새벽녘 샘가 여인네의 치성에 어진 성정을 부어

    이곳 영암에 인걸의 빛을 뿌렸도다.

     

    날빛이 어둠을 감싸듯

    글은 사람의 마음에 등불을 밝히나니

    훈민정음 창제 이전까지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천자문은 도덕과 경세의 거울이었다.

     

    백제의 문화는 담백하고 세련되어

    학문과 문물이 바다 멀리 교류되었다.

    고대 일본 응신천왕이 왕인박사를 초청하였을 때

    박사는 오직 한 가지 상생의 높은 뜻을 품고

    거친 파도를 넘어 문화의 바닷길을 건넜다.

     

    천자문과 논어로 일본에 학문의 씨앗을 뿌리고

    문화의 밭을 일구어 아스카문화를 꽃피웠다.

    ! 이토록 아름다운 역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리하여, 왕인박사를 흠모하는

    한국 일본 중국 1,000명의 명사들이

    천자문 한 자씩을 섬섬옥수로 쓰고

    천년을 기약하여 월출산 돌에 새겨

    여기, 박사가 태어난 성기동 왕인공원에

    千人 千字文상징조형물을 세우니

    사람들아 이곳에서 미래의 길을 물을지어다.


    200845





    왕인 박사가 전수한 千字文(천자문)’


    이곳 月出山 정기어린 聖基洞에서 탄생한 王仁박사는 5세기 초(405)

    일본() 應神大王의 초청을 받아 上臺浦를 출발, 渡東의 길을 떠난다.

    도대체 응신대왕은 어떤 분이며 그는 왜 왕인 박사를 초빙한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일본의 정치상황과 한일교류상을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응신대왕은 出自에 관한 일본 측 문헌에 의하면 당시 일본의 선진지역이었던 九州의 지쿠시(築紫)에서 출생. 성장하여

    엘리트들을 이끌고 畿內東遷, 河內지역(오늘날의 大阪府의 동남부)을 근거삼아 전국에 割據하던 맹주들을 차례로 제압,

    일본에 처음으로 古代國家를 세운 최초의 실존한 군왕으로 오늘날의 日本이라는 나라의 터전을 닦은 사람이다.

    그의 목표는 일본의 文明化大國化였다. 그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선진문화의 산업기술이었다.

    그런데 문화의 기술은 그것 자체만으로 이전할 수가 없고, 그것을 몸에 익힌 사람의 移住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사람의 신체는 그것들을 담고 운반하는 文化技術箱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응신대왕이 왕인박사 일행을 초빙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왕인박사는 무엇을 가지고 갔으며,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 어떻게 기여한 것일까?

    일본측 문헌(古事記, 日本書紀)에 의하면 論語 10권과 千字文 1, 11권의 전적을 가지고 가 왕자들을 가르치는 師傅가 된 한편,

    국가 운영에 필요한 官僚(행정), 貢賦(조세) 등 제반의 제도를 마련하고 직접 그 시행에 참여한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문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외교문서의 해독과 작성을 주도하여

    華夷體制 아래서 중국의 인정을 받아 응신정권의 대국화, 즉 고대국가 형성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한자를 이용하여 일본의 문자(萬葉假名)를 창안하는데도 힘을 쏟음으로써

     일본의 역사를 만든 101중 맨 앞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문화와 학문의 (文首, 書首)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이러한 활동에는 그와 동행한 卓素西素를 비롯하여 선진기술을 가지고 뒤이어 건너간 도래인들의 노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王仁이 전수한 천자문은 언제 누가 짓고, 그 내용은 어떠한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異論이 없지 않다.

    .이후 중국은 물론, 주변의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하던 천자문은

    대체로 나라의 周興嗣(470?~521)次韻天地玄黃 宇宙洪荒으로 시작되는 천자문이다.

    그것이 만들어진 것은 6세기 초로 추단하고 있다.

    만일 중국에 주홍사의 천자문만이 존재했다면 5세기 초에 渡東한 왕인박사가 천자문을 가지고 갔다는 얘기는 성립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중국에는 주흥사 이전에 이미 수종의 천자문이 만들어져 문자의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여러 자료들이 말해 주고 있다  






    천인 천자문(千人 千字文)


    5세기초 천자문을 비롯한 백제의 선진문물을 일본에 전하여 고대 아스카(飛鳥)문화를 꽃 피워

    ,일 문화 교류사를 빛냈던 영암출신 왕인(王仁)박사의 인류공동번영의 업적을 기리고,

    박사께서 남겨주신 '소통과 상생'의 정신을 널리 세계평화의 디딤돌로 삼기위해

    한국, 중국, 일본 1000명의 명사들이 육필(肉筆)로 천자문 한 자씩을 지극정성으로 쓰고,

    이를 다시 영암의 석공이 돌에 새겨 만든 왕인상징[천인천자문]조형물을 세워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이 조형물은 백제의 빛나는 문물을 싣고 다시 국제무역항이었던

    영암의 상대포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던 '문화의 배'를 형상화 한 것이다.

    양편에는 천인천자문을 펼치고, 일곱 겹의 달무리와 굽이치는 파도를 상징하는 형상을 중앙에 배치하여

    월출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왕인박사의 위업과 영암 사람들의 창조적 기상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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