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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초상화 전문박물관,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19. 12. 16. 04:30
왕의 초상화 전문박물관, 어진박물관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
어진박물관은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을 맞이해 2010년 11월 6일에 개관하였다.
이곳에는 국보 제317호인 태조어진을 비롯해 태조어진을 봉안할 때 사용된 각종 가마유물 및 경기전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태조어진(국보 제317호) 외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어진이 전시되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太祖御眞)
어진은 왕의 초상화를 말한다.
태조어진(국보 317호)은건국자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를 상징한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태조어진이 26축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유일하다.
태조어진은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색의 곤룡포,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에
가슴과 어깨에는 왕을 상징하는 다섯 발톱을 가진 용이 그려져 있다.
태조는 기록에 의하면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큰 귀가 아주 특이하다고 하였다.
태조어진을 보면 넓은 광대뼈에 눈과 입이 작으며 양쪽 귀가 큰 모습이다.
오른쪽 눈썹 위에는 사마귀까지 그려져 있어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영흥 준원전의 태조어진이 사진으로 전하고 있다.
경기전 태조어진이 흰 수염의 노년 모습인데 반해 준원전의 태조어진은 장년의 모습으로 검은 수염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다.
태조어진(太祖御眞) - 국보 제317호
1872년/비단에 채색/220×151㎝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으로 1872년(고종 9)에 모사한 진본이다.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으로,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 어진이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혼란기에 큰 전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였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태조어진(홍룡포)
2016년/비단에 채색/151×220cm/권오창 모사
경기전의 청룡포 태조어진(국보 제317호)을 홍룡포로 바꾸어 그린 것이다.
어진의 크기와 형태는 경기전 어진을 모본으로 하되 곤룡포의 색과 채전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어진을 토대로 하였다.
고궁박물관 태조어진은 1900년에 홍룡포로 모사한 것으로 용안을 비롯해 절반가량이 소실되어 있다.
태조어진(준원전)
2016년/비단에 채색/190×255cm/권오창 모사
사진으로 남아 있는 영흥 준원전 태조어진을 복원한 것이다.
검은 수염을 한 장년의 모습으로, 수염이 흰 노년의 경기전 어진에 비해 무장의 기운이 강하다.
화폭이 경기전 어진보다 크다. 어진 복원시 형태는 유리원판을 토대로 하고, 채색은 경기전 어진을 기준으로 하였다.
세종어진(世宗御眞)
현대/비단에 채색/114×164㎝/표준영정모사
세종어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세종어진은 김기창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1973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어진박물관 소장 세종어진은 김영철화백이 표준영정을 모사한 것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군주이다.
성군으로 칭송되는 세종은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문화와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영조어진(英祖御眞)
1900년/비단에채색/83x203cm/보물 제932호
1744년 영조 51세 때 사대부 화가 조영석 등이 그린 어진을 1900년(광무4년) 조석진·채용신 등이 모사한 영조 반신상이다.
현재 어진실Ⅱ에 있는 영조어진은 1900년의 반신상 어진을 토대로 하여 전신상으로 모사한 것이다.
영조는 31세에 왕위에 올라 83세까지 장수한 최장수 왕이며 재위기간(52년)이 가장 길었던 왕이다.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전개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경기전 뒤에 위치한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창건한 것이다.
정조어진(正祖御眞)
현대/비단에 채색/114×164㎝/표준영정복제
정조어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정조어진은 이길범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1989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여기 어진실의 정조어진은 표준영정을 촬영한 사진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한 군주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탕평정치를 전개해 붕당의 폐단을 해소하고,
왕권을 강화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큰 포부를 갖고 화성을 축조하여 천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철종어진(哲宗御眞)
2016년/비단에 채색/202x107cm/이철규 모사
철종어진(보물 1492호)은 철종이 31세 되던 1861년(철종 12)에 그린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화재로 오른쪽이 1/3쯤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다.
융복(군복) 차림이며,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손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오른손에 무관의 지휘봉인 등채를 잡고 왼손 엄지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사용하는 깍지를 끼고 있다.
용모에 순수한 인품이 반영되어 있으며, 눈썹이 짙고 쌍커풀이 진 동그란 눈에 눈동자가 안으로 모여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1849년 19세에 즉위하였다.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안동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 잡지 못한 채 1863년(철종 14) 33세로 병사하였다.
고종어진(高宗御眞)
현대/비단에 채색/114×164㎝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고종어진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므로, 이전의 조선 왕들과 달리 황제복인 황룡포 차림이다.
신정왕후(조대비)는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고 그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가 고종황제이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고종은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폐위되었다.
1919년 승하하였으며, 고종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순종어진(純宗御眞)
현대/비단에 채색/114×164㎝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순종어진이다. 면류관을 쓰고 십이장복을 입은 대례복 차림이다.
장복(곤복)은 의례를 행할 때 착용하는 것으로 황제는 십이장복, 왕은 구장복이다.
십이장복이란 명칭은 옷에 들어가는 문양의 수가 12가지라는 뜻이다.
순종황제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황제로 즉위하였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으로 강등되는 등 수모를 겪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순종 장례날인 6월 10일을 기해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태조어진의 전주봉안
조선왕조는 건국 후 태조어진을 한양을 비롯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신라의 수도 경주,
고려의 수도이자 태조가 살았던 개성, 태조의 출생지 영흥, 태조의 본향 전주 등 모두 6곳에 봉안하였다.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것은 조선 초인 1410년(태종 10)으로, 경주 집경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여 모셨다.
조선왕조는 건국자인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여 이곳이 왕실의 고향임을 분명히 하였다.
현재의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에 새로 모사한 것이다.
조선 초의 태조어진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그림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서 경기전 북계상(北階上)에 묻었다.
유린청(遊麟靑)
함흥산으로 운봉(황산대첩)에서 싸울 때 태조가 탔던 말
함흥본궁도(咸興本宮圖)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1901년 태조를 비롯하여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등 7분의 어진 모사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자만동 금표(滋滿洞 禁標)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자만동 일원(승암산 자락 발산 아래 마을)을 조선황실의 성지로 조성하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 나무를 베고, 몰래 묘를 쓰는 것 등을 금하는 표지석이다.
1900년경 오목대와 이목대를 성역화하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본래 4개가 있었는데 현재 1개가 이목대 비각 뒤 마을에 남아 있다.
재질은 전주에서 나오는 '전주석'으로 쑥돌이다.
전시하고 있는 이 금표는 전시를 위해 재질이 같은 전주석을 구하고
이를 손으로 새겨 본래의 금표를 재현한 것이다.
이교의를 경기전 수문장에 임용하는 병조 교첩이다.
그는 전주이씨로 영광군 홍농면 대덕동 사람이다. 무과급제자로 당시 38세였다.
이교의 무과 홍패(李敎儀 武科 紅牌)
경기전 수문장에 임명된 이교의의 무과 급제 홍패이다.
홍패란 문과와 무과 급제증을 말한다. 이교의는 무과 병과에 1,037등으로 급제하였다.
무과는 본래 28명을 선발하는 시험이나 한 번에 몇 천명을 선발하기도하여 만과(萬科)라고도 하였다.
경기전 참봉 임용장
서재규를 경기전 참봉으로 임용한 관고첩이다.
관고첩은 대한제국기 7품에서 9품까지의 관리인 판임관 임명장이다.
의정부 찬정 내부대신 조병식이 발급하였다.
경기전 중양대제
대향(大享, 6대 제향)
경기전의 대제는 1년에 여섯번,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臘日)에 거행되었다.
삼헌(三獻, 술을 세번 부어 올림) 및 음복례(飮福禮)까지 모든 절차를 행하였다.
1908년 두번으로 줄여 청명과 추석에 지냈고, 광복 이후에는 한번으로 줄여 동지에 지냈다.
1978년 부터는 음력 9월9일 중양일로 바꾸어 대제를 지내고 있다.
작헌례(酌獻禮)
작헌례는 어진의 이안, 또는 환안 때 지내는 일종의 고유제(告由祭)로서, 대제와 달리 일헌에 음복례가 없다.
분향례(焚香禮)
분향례는 매달 삭망(朔望, 초하루와 보름)에 지낸다. 제사 음식을 차려놓지 않고 간단하게 분향 및 봉심을 겸하는 의식이다.
다산 정약용, 전주를 지나며
누궐이경읍(樓闕移京邑) 누각 궁궐 서울을 옮겨다 놓았고
의관의사류(衣冠擬士流) 의관 문물 사류(士流)와 다름 없네
왕위경만중(王威驚萬衆) 임금 위엄 만백성 가슴 놀래고
묘모숙천추(廟貌肅千秋) 사당 모습 천년토록 엄숙하구나.
조선왕실 계보도
태조어진 봉안행렬(太祖御眞 奉安行列)
닥종이(한지) 인형으로 재현한 태조어진 봉안행렬이다.
300여명이 채조어진 봉안행렬에 참여하였으며, 한양에서 전주로 태조어진을 모셔오는데 7박 8일이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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