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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각산 진관사(三角山 津寬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20. 5. 4. 04:30

    삼각산 진관사(三角山 津寬寺)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津寬寺)는 예부터 "서쪽은 진관사(西津寬)"라 하여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사찰이다.

    고려사(高麗史)와 여암전서(旅菴全書) 등에 따르면 진관사는 신혈사(神穴寺)의 후신으로,

    1010년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大良院君) 시절에 왕위 계승 과정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했다고 한다.

    1090년 고려 선종(宣宗)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베푼 후부터

    여러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가적 사찰이 되었다.

    1397년 조선 태조는 진관사에 행차해 수륙사(水陸社)를 짓고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설행하게 하였고,

    1442년 세종은 사가독서당(賜暇讀書堂)을 진관사에 두고 집현전 학자들을 보내어 한글을 비밀리에 연구토록 하였다.

    이후 진관사는 6·25전쟁으로 인해 나한전·칠성각·독성전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1963년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최진관(崔眞觀) 스님의 노력으로 옛 사격(寺格)을 복원하였다.

    2009년 칠성각 해체 복원 불사 중 독립운동가 백초월(白初月) 스님이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太極旗)와 독립신문(獨立新聞) 등이 발견되어 독립운동의 거점사찰임이 확인되었고,

    2013년에는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주지로 부임한 계호스님은 템플스테이 체험관, 사찰음식체험관, 전통문화체험관을 건립하고

    역사와 문화, 포교의 중심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종교와 인종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마음의 정원'을 지향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길 73 (진관동) 전화 02-359-8410

     






    19681.21사태  무장공비 침투로


    이 침투로는 19681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기습과 대통령 암살을 위해 침투했던 주요 이동 통로입니다.

    중무장한 공비들은 경기도 연천군 휴전선 철책을 뚫고 시간당 평균 10km씩 주파하면서

    파평산, 노고산, 앵무봉을 차례로 지나 이곳 진관사계곡까지 잠입하였으며

    인적과 추위를 피해 이곳 바위동굴에서 은신,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이동하였습니다.

    마지막 공격 캠프인 사모바위 앞 동굴에서 최종 목표지점 점검을 하고 종로구 세검정길을  통해 청와대로 접근하던 중

    세검정 고개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교전이 발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군, 경 및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무장공비 침투로로 이용되었던 북한산 진관계곡 탐방로는 분단된 조국의 가슴 아픈 역사의 한 길목이기도 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의 가람 배치도






    慧月堂 大禪師 浮屠(혜월당 대선사 부도)




    진관사 입구의 하마비(下馬碑)




    마음의 정원 진관사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 늘 깨어있습니다.




    극락교(極樂橋)





    해탈문(解脫門)




    三角山津寬寺功積碑(삼각산진관사공적비) 三角山津寬寺寺蹟碑(삼각산진관사사적비)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은 극락교 지나 종무소 방향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님이다.

    아미타는 무한한 목숨을 지닌 자를 뜻하는 범어 아미타유스와 무한한 광명을 지닌 자

    아미타브하에서 아미타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본래 의미를 한자로 살린 이름이 무량수불(無量壽佛)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사찰의 극락전, 극락보전, 무량수전, 아미타전에 봉안되며 우협시보살로 관음보살,

    좌협시보살로 대세지보살과 함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아미타정인이나 설법인, 항마촉지인을 주로 취한다.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 유명하다.








    감로수(甘露水)




    향적당(香積堂) - 산사음식체험관


    향적은 중향(衆香) 나라의 부처님 이름으로 나라의 법의 향기가 시방무량세계(十方無量世界)에 주류(周流)한다는 뜻입니다.

    향을 넣어 두는 바리때를 향적주(香積廚)라 하고, 음식을 잘 만드는 곳으로 향적세계 곧, 향적계(香積界)가 있습니다.

    진관사 향적당은 보현보살님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진관사 산사음식연구소는 1700년 동안 이어진 사찰의 음식문화와 그 정신을 계승함과 동시에

    사찰음식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관사를 찾은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산사음식을 직접 배우고 맛보게 함으로써

    한국의 깊은 마음과 불교의 정신을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세심교(洗心橋)




    홍제루(弘濟樓)


    진관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초입에 있는 누각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형식의 건물로서

    1층은 석주기둥으로 구성되었고 2층은 팔작지붕의 목조건물로 1977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건물입니다.

    절에 진입하는 출입구로 경내에 들어서려면 누각아래의 중앙 계단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건물 1층은 석주를 세워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으며,

    석주에는 대종대시주비가 새겨져 있어 조선후기 진관사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외 석주 좌우로는 목조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출입구에는 사천왕문을 대신한 듯 인왕상이 단청되어 있습니다.

    이외에 2층은 현재 강당으로 사용되는데,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사찰을 참배하고 집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외부는 계자난간을 둘러 진관사를 찾는 참배객들의 휴식처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홍제루(弘濟樓) 주련(柱聯)


    慈光照處蓮花出(자광조처련화출) 자비광명이 비추는 곳에 연꽃이 피고

    慧眼觀時地獄空(혜안관시지옥공) 지혜의 눈이 열리니 지옥도 본래 없네

    又況大悲神呪力(우황대비신주력) 또한 다시 대비신주의 힘으로

    衆生成佛刹那中(중생성불찰나중) 중생을 찰나 중에 성불시켜 주시도다

    普濟人天難思量(보제인천난사량) 널리 인천을 제도함이 사량키 어려움이라

    招憑諸佛大悲力(초빙제불대비력) 제불의 대비력을 불러 의지함이요

    衆生不盡業茫茫(중생불진업망망) 중생의 업이 아득하고 아득하여 끝이 없음이여

    世界無邊塵擾擾(세계무변진요요) 가없는 중생계는 어지러이 일어나는 먼지와 같음이여   








    동정각(動靜閣)


    나가원 아래에 있는 정면 1, 측면 1칸의 사모지붕의 목조건물로, 1975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이다.

    건물은 계단석이 있는 가구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사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기둥에는 낙양각이 장식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어간에 근대 불교계의 대강백(大講伯) 탄허(呑虛)스님이 쓴 동정각(動靜閣)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기둥 외부로 주련(柱聯)이 있다.

    건물 내부는 진관사의 범음을 전달하는 범종(梵鐘)이 걸려 있는데,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160, 구경 91, 300관의 대형범종이다.


    동정각(動靜閣) 주련(柱聯)

    願此鐘聲遍法系(원차종성편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철위산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 다 밝아지며

    三途離苦破刀山(삼도리고파도산) 지옥·아귀·축생의 고통 여의고 칼산지옥 깨뜨려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일체 중생이 바른 깨달음 이루어 지이다.

     




    나가원(那迦院)


    나가원은 대웅전 우측에 있는 정면 7,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2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입니다.

    건물은 콘크리트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건물전면 3칸에 툇마루를 두어 요사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사채지만 건물 외부는 동자도와 화훼도 같은 단청이 칠해져 단정한 멋이 느껴지며,

    어간에는 현판을 비롯하여 주련 8기가 걸려 있습니다.

    건물 내부는 정면 3칸은 대중방으로, 그리고 좌우 2칸은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중방에는 1972년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石造觀音菩薩坐像)

    1973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홍탱(阿彌陀後佛紅幀)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나가원(那迦院) 주련(柱聯)


    細推今舊事堪忍 貴賤同歸一土邱(세추금구사감인 귀천동귀일토구)

    고금의 사바사계 일 살펴보았더니귀한 이나 천한 이나 모두 흙으로 돌아갔네


    梁武玉堂塵已沒 石崇金谷水空海(량무옥당진이몰 석숭금곡수공해)

    양무제의 화려한 궁궐도 이미 티끌이 되었고석숭의 금곡도 빈 바다의 물거품이 되었네


    光陰乍曉仍還夕 草木春卽到秋(광음사효잉환석 초목춘즉도추)

    시간은 잠깐 새벽이었다가 곧 저녁이 되어버리고초목은 겨우 봄인 듯 싶더니 문득 가을이네


    處世若無毫末善 死歸何物答冥候(처세약무호말선 사귀하물답명후)

    세상살이 털끝만큼도 좋은 일 없으니죽으면 어떤 물건으로 염라대왕에게 답하랴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진관사 가람의 중심 전각으로 대웅전 안의 불상은

    석가모니불(현세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거불), 미륵보살(미래불)의 삼세불(三世佛)을 모시고 있습니다.

    후불탱화는 비로자나불(법신불), 노사나불(보신불), 석가모니불(화신불)의 삼신불(三身佛)이 모셔져

    현상과 시간에 걸림이 없는 원융한 부처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관불의식(灌佛儀式)


    물을 한 번 떠서 세 번에 나누어 부처님 정수리에 흘려보내며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첫 번째,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

    두 번째, 삼생(三生)의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합니다.

    세 번째, 몸과 마음이 지혜롭고 복되게 하여지이다.




    관불


    아기 부처님의 몸을 씻겨 드리며

    자신의 마음에 쌓인

    집착하고 욕심내는 마음

    화 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씻어내고

    맑고 깨끗한

    내 안의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

    마음을 모아

    내 안의 부처님을 생각하며

    당신은 부처님 이십니다.  




    코로나야 고마쫌 가라

    마이무따아이가


    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내가 가장 존귀하도다.

    삼계의 일체 모든 괴로움을(중생들을) 내가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불기 2564(2020)년 부처님 오신 날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

    기간 : 2564(2020)430~ 530




    독성전(獨聖殿)


    독성(獨聖)홀로 깨달은 분이란 뜻으로 주로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 부릅니다.

    나반존자는 16아라한의 한 분이신 빈두로파라타존자를 말하며 신통이 뛰어나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세상을 제도하면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는 분입니다.

    독성전에는 독성상(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1), 독성도(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2)와 함께

    산신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9)도 함께 봉안되어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저승세계인 명부(冥府)를 상징하는 곳으로,

    그곳에서 중생을 제도하여 극락왕생으로 이끄는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저승세계의 심판관들인 시왕(十王)이 좌우로 늘어 모셔져 있습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이 중심이 되기에 지장전(地藏殿)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지장보살의 좌우 협시(挾侍)는 스님모습의 도명존자와 상자를 든 무독귀왕입니다.

    명부전의 편액과 주련은 한국 근대불교의 대강백(大講伯)인 탄허(呑虛)스님의 글씨입니다.





    칠성각(七星閣)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33


    칠성각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 칠성대군을 모신 곳입니다.

    칠성신앙은 수명과 복, 아이를 점지해 준다고 하여 민간에서 오래전부터 신앙되어온 것이 불교에 흡수된 것입니다.

    석조여래좌상(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0)과 칠성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7)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나한전(羅漢殿)


    나한은 부처님의 깨달은 제자들을 말하며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 하여 응공(應供)이라고도 합니다.

    독성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나한전에는 소조 석가삼존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3),

    소조 16나한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4), 영산회상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5)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의 기와불사












    송풍자명(松風煮茗)

    솔바람으로 차 싹을 달인다는 뜻이다.



    함월당(含月堂)


    달을 품은 집인 함월당은 템플스테이관으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님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2013년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함월당과 효림원에서 진행되는 진관사 템플스테이는

    삶의 쉼표가 간절한 일반인들과 외국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이끌어내며

    한국 불교와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자연과 불교, 그리고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진관사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는 것은

    잊고 있던 자신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천년고찰 진관사에 스며든

    역사의 숨결은 전통문화의 멋과 생명력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김칫광















    태극기(太極旗)


    三角山(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

    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

    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

    우리 太極旗를 오늘 다시 보앗네

    自由(자유)의 바람에 太極旗 날니네

    二千萬 同胞(이천만 동포)萬歲(만세)를 불러라

    다시 산 太極旗萬歲萬歲(만세만세)

    다시 산 大韓國(대한국).


    - 진관사 칠성각에서 발견된 독립신문 제30호에 실린 태극기 시의 일부 -

     

    진관사 칠성각 해체 복원 불사 중에 독립신문을 비롯한 신문 620점이 태극기 안에 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1919년 중국과 국내의 항일독립운동에 실제 사용된 것으로

    진관사가 당시 서울 지역 항일독립운동의 거점 사찰이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진관사와 독립운동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8대 임금 현종 2(1011)년에 건립된 천년 고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각들이 한국전쟁 때 공비소탕작전으로 소실되고

    나한전(羅漢殿), 칠성각(七星閣), 독성전(獨聖殿) 3동의 불전(佛殿)만 남았습니다.

    그 중 칠성각과 독성전이 2009년도 5월부터 전면적으로 보수작업을 하게 되어

    건물해체과정 중 대들보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칠성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526일 칠성각 내부해체 과정에서 칠성각의 불단(佛壇)과 기둥 사이에서

    한지로 된 큰 봉지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어서 이를 떼어내자

    태극기를 보자기처럼 사용하여 싸여져 있는 독립신문 등 20여점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태극기는 19193.1운동 당시 기관이나 단체가 제작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것으로 태극기 및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신대한신문 2, 3호가 최초로 발견되는 등 신대한신문 3, 독립신문 4, 조선독립신문 5점 등

    191966일부터 1225일까지 제작된 다수의 사료가 발견되었습니다.

     사료들은 3.1운동 당시의 생생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입니다.

    발견된 사료들은 진관사에 주석했던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1920년 초, 일제에 체포되기 직전

    긴박한 상황에서 비밀리에 진관사 내의 한적한 건물(칠성각)의 벽속에 숨겨 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빛이 차단된 밀폐공간에서 90년간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발굴된 진관사 태극기와 문서를 보관, 은닉했던 장본인으로 여겨지는 백초월 스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부터 임시정부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을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1920년 초반, 일제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반미치광이 될 정도가 되어 출옥하였지만 민족의식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는 동학사 강사(1930년대 초반), 월정사 강사(1935), 봉원사 강사(1936) 등을 역임하였고,

    1938년 초부터 다시 진관사 마포 포교당에 다시 머물면서 포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1939년경에 발생한 이른바 독립만세 낙서 사건으로 일제에 피체되었습니다.

    즉 진관사 마포포교당에 거주하면서 용산 철도국의 작업부로 일하던 박수남이

    봉천행 화물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낙서의 배후자, 영향을 준 인물로 지목되어 2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나왔지만,

    또 다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결국 그는 19446월 청주 교도소에서 옥중 순국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으로서 독립운동의 상징인 태극기와 신문들을 일제의 살벌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칠성각 불단 깊은 곳에 숨겨 놓은 후 그것을 숨겼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고 90여 년이 흐른 뒤에 발견되었습니다.

    역사의 한을 품고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불심으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는

    단순히 태극기라는 명칭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역사성, 민족성, 사찰의 애국심, 스님의 구국정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단 하나뿐인 문화재로써 그 가치가 인정되어야 하며, 후대들이 한때의 불행했던 한일간의 치욕적인 역사를

    영원히 기억하고 교훈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자료관의 유물로써 보존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는 2010225일에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등록문화재 제458호 진관사 태극기





    진관사(津寬寺)

     

    (진관사의 창건기)

    진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1011(顯宗 2)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집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誌)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景宗 6)에 경종이 죽고, 성종(成宗)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964~1029)

    그의 아들 송()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獻哀王后)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됩니다.

    또한 태후는 성종년간에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고

    마침내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

    태조(太祖)의 아들인 욱(,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집니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합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됩니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습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습니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 ,서 승당이 각 30,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寮)가 각 10,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또한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습니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법회(落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진관사)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됩니다.

    1090(宣宗 7) 10월에 선종(宣宗)은 진관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성대하게 봉행하였으며,

    1099(肅宗 4) 10월에는 숙종(肅宗)이 진관사에 친행하였고,

    그 후 1110(睿宗 5) 10월에는 예종(睿宗)이 진관사에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진관사와 수륙사)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집니다.

    1397(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됩니다.

    1397(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됩니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적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도 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며,

    1397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은 모두 59칸으로, ,,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과 규모를 갖추게 됩니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太宗 13)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1421(世宗 3)에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1442(世宗 24)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습니다.

    1452(文宗 2)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1463(世祖 9)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 후 1470(成宗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854(哲宗 5)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高宗 16)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진관사)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慶雲)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보수하였습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 의 자원으로 쓰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근대기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일신한 진관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진관(眞觀) 스님은 1965년에 현재의 대웅전(大雄殿)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三尊佛) 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 후불탱(後佛幀) 및 신중탱(神衆幀) 을 조성하여 진관사 주법당(主法堂)을 여법(如法)하게 일신하였습니다.

    1968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하여 1969년에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하고, 1972년에 나가원(那迦院) 을 신축,

    1974년에 범종(梵鐘) 조성, 1975년 동정각(動靜閣)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伽藍)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가람(伽藍)이 복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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