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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국내 나들이/공연장(公演場) 2020. 6. 7. 21:27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의 근원은 서울 중심의 경기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분파로서, 녹번(碌磻)·아현(阿峴) 등지의 본산대(本山臺)와 같다.

    약 200년 전부터 해마다 사월초파일과 단오에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해 놀았으나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자 양주골의 신명이 많은 사람들이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본(本)산대가 전해지지 않는 오늘날, 이 놀이는 경기지방의 대표적 탈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이 놀이는 사월초파일과 단오·추석에 주로 연희되고, 크고 작은 명절 외에도

    가뭄 때 기우제(祈雨祭) 행사로 연희되었다.

    격식대로 하면 놀이 전에 고사를 지내고 제물을 음복(飮福)한 뒤 놀이를 시작했으며,

    제석(除夕)에는 가면(假面)을 쓰고 동헌(東軒)을 비롯, 육방(六房)을 돌아 축사(逐邪)했다.

    초청이 있을 때에는 다른 지방에도 순연(巡演)해 응분의 전곡(錢穀)이나 주식(酒食)의 대접을 받았다.

    놀이비용은 마을유지들과 부잣집 혹은 상인들이 추렴했고, 연희자는 원칙적으로 무보수였다.

    놀이터는 주로 마을 북서쪽 불곡산(佛谷山) 아래의 사직골이었고,

    여기에 당집이 있어 놀이의 가면과 여러 도구를 보관해왔다.

    근래에는 사직당(社稷堂)과 그 앞 놀이터가 없어진 관계로

    향교 외삼문(外三門) 안마당이나 전수회관 앞뜰에서, 대부분 낮에 연희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먼저 길놀이부터 시작되는데, 사직골 당집에서 가면과

    다른 도구를 내려다가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동네 집합장소로부터 공연 장소까지 행렬하는 것이다.

    마을에서 찬조를 받을 만한 집 앞에 이르면 행렬을 멈추고 영기(令旗)를 세워놓는데,

    대개 쌀이나 돈을 찬조한다. 길놀이일행 외의 연기자와 주최자들은 먼저 공연 장소에 가서

    개복청(改服廳)을 설치하고 고사준비를 한다.

    길놀이일행이 공연 장소에 이르면 노장과 소무는 개복청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탈들은 놀이판에서 춤을 추고 나서 개복청에서 놀이복색을 벗고

    도포나 두루마기만 입은 채 고사에 참례한다.

    고사는 연희자 중에서 제관과 집사가 나와 지내며, 제사상을 마련하고 그 뒤에 가면을 순서대로 배열한다.

    제관이 술을 붓고 절을 하며, 고사 지내는 말로써 순서를 마치는데,

    연희자와 관중의 무사를 빌고 이때에 소지를 올려 이미 고인이 된 연희자들의 성을 부른다.

    놀이의 과장(科場: 마당 구분)은 그리 엄격한 편은 아니고

    주제별로 된 몇 개의 드라마가 옴니버스 스타일(omnibus style)로 한 테두리 속에 들어 있다.

    대체로 8과장이나 10과장 혹은 12과장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내용은 산대도감계통극과 공통된 것으로서,

    조선시대 서민문학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파계승(破戒僧),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그 밖의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해 현실폭로와 풍자·호색(好色)·웃음·탄식 등을 보여준다.

    그 주제는 크게 나누어 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 서민생활상을 보여주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제1과장 ‘상좌춤’은 벽사(僻邪)의 의식무(儀式舞)이며,

    제2과장 ‘옴중과 상좌’는 주로 옴중과 상좌의 재담으로 엮어진다.

    제3과장 ‘옴중과 목중’에서는 옴중의 의관과 얼굴에 대한 재담을 나눈다.

    옴중은 옴벙거지로써 자신의 지체를 높이려 하나 결국 옴이 오른 중임이 발각난다는 내용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에서는 초월적 능력을 가진 고승 연잎과 눈끔적이가 나타나

    파계승 옴중과 목중을 벌한다. 이 과장은 봉산탈춤의 사자의 출현과 견주어지나,

    사자보다 훨씬 숭고하고 초월적인 모습을 지녔다는 점이 다르다.

    제5과장 ‘팔목중놀이’는 제1경 염불놀이· 제2경 침놀이· 제3경 애사당북놀이의 3경으로 나누어져 있다.

    ‘염불놀이’는 8목중이 염불의 형식을 빌려 염불을 희화화(戱畫化)시키면서 그들이 타락한 중임을 보여준다.

    ‘침놀이’는 말뚝이가족의 얘기로서 자식·손자·증손자가 죽게 되어

    친구 완보의 소개로 신주부를 불러 침을 놓자 모두 살아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한다는, 현세에 더 큰 가치관을 두고 있는 탈춤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애사당북놀이’는 목중들이 애사당을 희롱하면서 법고 치는 것으로 재담하는 내용인데,

    여기서도 승려의 파계상을 풍자하고 있다.

    이상의 제5과장은 조선 후기 서민생활의 실상과 승려의 파계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제6과장 ‘노장’은 제1경 ‘파계승놀이’, 제2경 ‘신장수놀이’, 제3경 ‘취발이놀이’로 짜여져 있다.

    ‘파계승놀이’는 노장의 파계과정을 춤과 동작으로 보여준다.

    ‘신장수놀이’는 노장이 두 소무와 살림을 차린 뒤 신장수에게서 두 소무의 신발을 외상으로 사고,

    외상값을 받으러 간 원숭이는 소무를 희롱하며 그냥 온다는 내용이다.

    ‘취발이놀이’는 취발이가 등장해 노장에게서 소무 한 명을 빼앗아 살림을 차린 뒤 아이를 얻고 글을 가르친다.

    늙음과 젊음의 대결에서 젊음의 승리, 모의적인 성행위와 출산을 통해

    자연의 풍요를 비는 제의적(祭儀的) 성격과 아울러 굿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 과장은 전체적으로 노장에 대한 풍자적 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제7과장 ‘샌님’은 제1경 ‘의막사령(依幕使令)놀이’와 제2경 ‘포도부장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의막사령놀이’는 하인 말뚝이가 샌님·서방님·도령님을 모시고 나와 친구 쇠뚝이와 함께

    위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양반들을 모욕하고 신랄하게 풍자한다.

    ‘포도부장놀이’는 샌님이 자기의 첩 소무를 평민인 젊은 포도부장한테 빼앗기는 내용으로서,

    늙음에 대한 젊음의 승리, 양반에 대한 평민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 과장은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모욕으로써 서민정신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는 노인 신할아비가 부인 미얄할미와 다투다가 미얄이 죽자

    아들·딸을 불러 장사를 지내는데, 이때 딸이 무당이 되어 지노귀굿을 한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과 갈등 및 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며, 굿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이로써 연희는 모두 끝난다.

     

    배역들은 연희가 끝나면 탈을 태우거나 부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약 60여 년 전부터는 사직골에 당집이 있어 탈을 당집에 보관했다가 해마다 개장(改粧)해 썼고,

    당집이 없어진 뒤로는 연희자의 집에 보관해 오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가면은 봉산탈춤의 가면에 비해 사실적이다.

    등장배역 총 인원수는 32명이나, 겸용하는 가면이 있기 때문에 실제 사용하는 가면수는 22개 내외이다.

    가면의 재료는 주로 바가지이고, 그 외 종이·나무 등이다.

    반주악기는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피리 2개와 젓대·해금·장구·북 등이며

    꽹과리와 태평소를 추가하기도 하고, 피리와 장구만으로 하기도 한다. 반주악은 염불·타령·굿거리 등이다.

    춤사위의 분류는 어느 탈춤보다도 자세해 거드름춤과 깨끼춤의 두 종류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각각 10여 종류로 구체적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민속춤의 기본은 여기서 찾을 수도 있다.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 1399번길 47 (유양동) 양주별산대놀이마당

     

     

    유양팔경(維楊八景)

     

    양주시 유양동에는 옛날 양주목사가 중국의 팔경을 본떠 만든 유양팔경이 내려온다.

    일명 양주팔경이라고도 한다.

    유양팔경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조선 중기의 시인 유몽인(柳夢寅)이 읊었다고 하는 시에 처음

    유양팔경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고 하나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다만 유양동이 바로 양주 지역의 중심지였기에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지나쳤으며,

    양주의 중심인 유양동에 여덟 가지 빼어난 경치가 있다고 읊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유양팔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산성낙조(山城落照)라 하여 양주 대모산성(楊州大母山城),

    즉 양주산성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모습이 유양팔경 중 으뜸인 제1경이라고 한다.

     

    2. 기당폭포(妓堂瀑布), 즉 계단폭포라 하여 마치 계단을 이루면서 떨어지는 듯한

    불곡산 계곡의 폭포 광경이 매우 아름다워 제2경으로 꼽았으나, 지금은 기당폭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3. 화암종성(華庵鐘聲)이라 하여 불곡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백화암(白華庵)의 새벽 종소리가

    마치 사람의 내재되어 있는 영혼을 일깨운다고 하여 제3경으로 부른다.

     

    4. 선동자화(仙洞煮花)라 하여 신선이 기당폭포 주변에서 진달래 꽃지짐을 해먹는 것처럼

    기당폭포 주변 진달래 핀 풍광이 멋드러진다는 것에서 제4경이라고 한다.

     

    5. 금화모연(金華暮烟)이라 하여 양주목사와 백성들이 함께 여흥을 즐겼던

    관민동락(官民同樂)의 명소인 금화정(金華亭)에서 바라 본, 민가에서 피어오르는

    저녁 짓는 굴뚝 연기가 마치 평화롭고 포근한 유양동의 모습을 표현한다고 하여 제5경으로 부른다.

     

    6. 승학연류(乘鶴烟柳)라 하여 지금의 남방동에서 유양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유양천을 건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승학교와 주변에 어우러진 버드나무의 풍광을 제6경이라고 한다.

     

    7. 도봉제월(道峰霽月)이라 하여, 금화정에서 바라본 도봉산 영봉 위에 뜬 초승달의 풍광이

    가장 아름다워 제7경이라고 부른다.

     

    8. 수락귀운(水落歸雲)이라 하여 유양동에서 바라보이는 수락산 영봉에 감도는

    구름의 풍광 또한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하여 제8경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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