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 이황 표준 영정일상생활속에서/우리의 옛 것들.. 2020. 7. 5. 21:22
퇴계 이황 표준 영정
이유태 화백이 그린 퇴계 이황의 표준 영정으로 천 원권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이 초상에서 퇴계는 폭건과 심의 등 사대부의 전형적인 편복을 입고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동설(理動說)·이기호발설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중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천 원권(1,000원권) 디자인
디자인은 퇴계 이황을 전면에 배치하고 성균관 유생들이 글을 익힌 명륜당을 배경으로
퇴계선생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매화나무를 이미지화 하였고,
명륜당(보물 제141호)은 조선시대 유생을 교육시키던 성균관내 건물이며
퇴계 이황은 성균관 최고 직위인 대사성(정3품)을 수차례 역임하였다.
뒷면 소재로는 퇴계 이황이 기거하던 도산서원의 주변 산수를 담은
겸재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인 계상정거도(보물 제585호)를 담았다.
발행일자: 2007년 1월 22일 규격: 136×68㎜
디자인: 퇴계 이황, 명륜당, 매화, 계상정거도
위조방지장치 : 돌출은화, 숨은그림, 앞뒷면 맞춤, 볼록인쇄, 미세문자,
홀로그램부분노출은선, 요판잠상, 색변환잉크
'일상생활속에서 > 우리의 옛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뱃대(煙竹, 연죽) (0) 2021.03.11 말뚝박기 놀이 (0) 2020.07.22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 19세기 중반 (0) 2020.06.07 옛 초막골 옹기터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옹기원(甕器院) (0) 2020.05.27 은평한옥마을(恩平韓屋村) (0) 20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