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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암서원(筆巖書院) - 유네스코 세계유산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7. 22. 04:44

    光風霽月 淸水芙蓉(광풍제월 청수부용)

    筆巖書院周邊整備紀念(필암서원주변정비기념)

     

    조선왕조가 사액을 한 사적 제242호 필암서원은 도학 문장 절의를 겸비한

    하서 김인후(金麟厚) 선생(1510~1560)의 본원으로 서원이 유구한 세월이 흘러 노후 되었고,

    주변이 협소하여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주변을 정비하였으니

    이제는 숲속의 서원으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모습을 갖추었다.

    아- 우동사의 분향 내음과 청절당의 글 읽는 소리는

    확연루 삼연정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함께 천년에 걸쳐 영원할 것이며,

    사계절 선비들은 숙연히 옷깃을 여미고, 시인 묵객들은 저절로 걸음을 멈출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저 황룡강은 오늘의 기념비 건립을 축하하는 노래를 연주하는 듯하다.

    2006. 5. 4

    민선 1, 2, 3대 장성군수 金興植(김흥식)

     

     

     

    확연루(廓然樓)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門樓)로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 추구의 엄정함으로 압도할 뿐만 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拱包)는 엄숙하면서도 고졸(古拙)한 맛을 풍긴다.

    1층은 출입문, 2층은 유생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편액은 호방 강건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친필이다. 2층, 18칸, 13평.

     

     

    하마석(下馬石)

    사람들이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디딤돌로 사용하기 위해 대문 앞에 놓아둔 넓적한 돌이다.

     

     

    필암서원 진입영역

     

    청절당(淸節堂)

    유생들의 강학공간(講學空間)으로 중앙은 대청, 좌우에 협실로 구성되어 있고,

    옛 진원현의 객사건물을 옮겼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신도비문(神道碑文)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글을 인용하였으며

    편액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의 친필이다. 15칸, 26평.

     

     

     

    필암서원

    필암서원이라는 글씨는 윤봉구(尹鳳九, 1681~1767)가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필암서원의 ‘필’자를 ‘대나무 죽(竹)’을 쓴 ‘필(筆)’자를 쓰지 않고

    ‘풀 초(艸)’ 밑에 ‘聿(율)’자를 쓰는지에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조선조 현종 때에 ‘필암서원’이라는 액호를 처음으로 사액받았는데,

    그때 윤봉구가 현판에 이렇게 쓴 것이라 전해진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관습적으로 이 글자를 써오고 있는 것이다.

    윤봉구가 사액 현판을 쓰면서 글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니고

    한자는 한 글자를 여러 가지로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죽(竹)’ 밑에 쓰지 않고 ‘초(艸)’ 밑에 쓰게 된 것이다.

    ‘竹’과 ‘艸’는 같은 6획으로 흔히 혼용한 예가 많으니

    송준길이 쓴 청절당의 현판도 ‘절(節)’ 자를 ‘竹’ 밑에 쓰지 않고 ‘艸’ 아래에 쓰고 있다.

    따라서 과거에 선인들이 관습적으로 써 오던 전통을 그대로 지켜

    현재도 ‘풀 초(艸)’ 밑에 ‘聿(율)’자가 있는 필암서원을 쓰고 있다.

    이 현판 글씨는 곧고 바른 필획을 구사했음을 볼 수 있다.

    중후한 서풍과 풍격을 자아내고 있다.

     

     

    경장각(敬藏閣)

    경장각은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내린 묵죽도(墨竹圖)와 그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다.

    정조 10년(1786)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판 글씨는 정조가 손수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임금이 쓴 글씨는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현판을 얇은 천으로 가렸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형식이다.

     

     

     

    계생비(繫牲碑), 묘정비(廟庭碑)

    계생비는 필암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은 비석이며,

    제관들은 매어 놓은 가축을 검사한 후 제물로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비석 앞면에 '필암서원계생비'라 새겨져 있는데 송일중 선생이 썼다.​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 대하여 기록하는 비석이며,

    서원비(書院碑)라고도 불린다. 비석 뒷면 묘정비문은 송병선 선생이 글을 짓고,

    윤용구 선생이 글씨를 썼다.

     

     

     

    우동사(祐東祠)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어 18선정(先正)인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을 주향(主享),

    제자이며 사위인 고암(鼓岩) 양자징(梁子澂) 선생을 종향(從享)으로 모신

    필암서원의 사우(祠宇)로 편액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 집획(集劃)하였다.

    4칸 반, 9평.

     

     

    진덕재(進德齊)​

    서원에서 공부하는 원생들이 생활하며 잠을 잤던 기숙사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의 현판 글씨는 송준길 선생이 썼다.

     

     

    장판각(藏板閣)

    유생들의 학습을 위한 책판 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하서 선생 사후 3차례에 걸쳐 간행된

    하서 선생 문집(文集) 649판, 호방 용무하게 초서로 남긴 초천자문(草千字文) 18판,

    무이산의 아홉 구비 경치를 노래한 무이구곡(武夷九谷) 18판,

    초학자의 학습을 위하여 매 글자마다 음을 달고 뜻을 풀이한 백련초해(百聯抄解) 13판,

    필법(筆法) 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5호, 제216호로 지정된 판각들이 보관되어 있다.

    3칸 4평.

     

     

    정방(淨房)

    지금의 화장실로 뒷간 또는 측간(廁間)으로 불린다.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필암서원(筆巖書院) - 유네스코 세계유산

     

    필암서원은 뛰어난 학식 때문에 호남의 유종(儒宗)이란 칭송을 듣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를 모신 곳이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卞成溫)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웠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1624년(인조 4) 복원되었으며 1662년(현종 3) '필암(筆巖)'으로 사액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786년에는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이 서원에 소장된 문서들은 보물 587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는데

    총15책 65장의 필사본들로 고문서류이다.

    이 자료들은 필암서원의 임원, 원생, 조선 후기 서원의 재정과 노비 소유,

    서원의 운영사항과 지방관청 및 유림사회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전남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존치된 서원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서원중 호남지역의 유일한 서원이다.

    또한 필암서원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는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된 동방18현중

    유일한 호남사람으로 호남지역민들이 이를 대단한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자랑거리이다.

    즉, 필암서원은 호남의 대표서원이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사적 제242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나 김안국의 제자로 수학하였으며,

    후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이 되어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으며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였으며,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하서집》, 〈주역관상편〉 등이 있다.

    정조는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였다.

    인촌 김성수가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하서 김인후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는데

    인종은 어진 성품과 뛰어난 학식을 갖춰 명군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1545년 즉위 8개월 만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病死)하였고,

    인종의 이복동생 명종이 보위에 올라 하서를 등용하려 했으나,

    인종이 승하한 뒤 정치에 뜻을 접은 하서는 벼슬을 탐내지 않고

    고향 장성에 칩거하며 후학 양성에만 매진하였다.
    필암서원에는 하서와 세자 시절의 인종이 얼마나 막역한 사이였는지 보여주는 유물이 많다.

    인종이 직접 그려 스승인 하서에게 줬다는 그림 묵죽도(墨竹圖)와

    인종 승하 후 하서가 그를 ‘님’에 비유해 쓴 시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인종이 하사한 그림 ‘묵죽도(墨竹圖)’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경장각(敬藏閣) 건물 현판의 흘림체 글씨는 정조가 직접 쓴 것이다.

    필암서원은 호남의 자랑이자 장성의 자랑이어서인지 주변정리도 잘 되어있고

    서원옆에 유물관도 잘 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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