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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안문(長安門) - 사적 제3호 화성
    수원사랑/수원화성(水原華城) 2020. 7. 29. 04:10

    북옹성(北甕城)

    북옹성은 장안문 바깥에 반달 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옹성 한가운데 내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했다.

    조선 시대에 만든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을 중앙에 만든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유일하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五星池)를 설치하여 화공에 대비했다.

    오성지는 화성에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서 정약용이 제안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다.

    * 오성지 :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 1795년(정조 19) 창건, * 1975년 수리

     

     

    오성지(五星池)

     

    적의 화공(火攻)에 대비하여 성문 위에 만들어 놓은 수조(水槽).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다섯 개의 구멍을 내어 물이 흘러내리게 되어있다.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 위에 적루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升)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오성지(五星池)를 통해서 본 북쪽시가지(영화동)

     

     

    장안문 문루 내부

     

    장안문과 북옹성문의 용그림

    장안문 기단의 성혈(性穴)

    성혈(性穴)이란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성혈은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 암반에 새겨 놓았는데,

    그 파인 형태적 차이에 따라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뫼 등으로 부른다.

    성혈은 단단한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홈을 말한다.

    옛 선사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돌을 갈아내어 성혈을 팠다.

    아직 성혈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없다.

    하지만 돌로 돌을 갈아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성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혈은 몇 개씩 파여져 있기도 하다.

     

     

     

    장안문(長安門)의 총흔(銃痕)

    장안문에는 곳곳에 움푹 파인 총탄 흔적이 다수 남아 있다.

    6.25 한국전쟁 때 총탄에 훼손된 흔적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장안문에 새긴 공사 책임자 실명판(공사 실명제)

     

    화성의 각 성문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감과 성실함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곳곳에 축성 책임자의 이름과 일꾼을 관리하는 패장의 이름,

    석수 책임자의 이름을 석벽에 새겨 놓았다.

     

    監董 前牧使 李柏然(감동 전목사 이백연)

    前府使 梁塤(전부사 양훈)

    牌將折衡 徐有春 金義淳(패장절형 서유춘 김의순)

    出身 李敬培(출신 이경배)

    閑良 李鎭溫(한량 이진온)

    石手 韓時雄 等 九十二名(석수 한시웅 등 92명)

     

     

    화성성역의궤 장안문 내도(內圖)와 외도(外圖)

     

     

    사적 제3호 장안문 표석

     

     

    평지 북성(平地 北城)

    평지 북성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네 구간으로 나눈 성벽 가운데 평지로 이루어진 북쪽 성곽이다.

    북문인 장안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북동적대부터 북수문(화홍문)까지,

    서쪽은 북서적대부터 서북공심돈까지 모두 10개 시설물이 있다.

    이 일대는 지형이 평탄한 편이어서 방어에 유리하도록 다른 곳보다 성벽을 높게 쌓았다.

    장안문 주변은 성벽이 약간 바깥으로 나온 편이다.

    이는 처음에 화성의 성벽 위치를 결정할 때 민가가 밀집해 있는 지역을 피하고,

    남문과 북문의 거리를 확보하라는 정조의 뜻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북성 구간에서 눈 여겨 볼 것은 성문 양쪽에 적대를 세운 장안문, 수원천과

    누각이 조화를 이룬 화홍문, 빼어난 군사 시설인 서북공심돈을 들 수 있다.

     

     

     

    장안문(長安門) - 사적 제3호 화성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로 보고,

    남쪽으로 현륭원(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敵臺)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100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목수인 광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도선 시대 정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6.25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 1794년(정조 18) 창건, * 한국전쟁 때 문루 파괴 * 1975년 문루 복원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910 (북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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