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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함월산 골굴사(慶州 含月山 骨窟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21. 6. 19. 04:17

     

    원효성사 열반성지 골굴사(혈사) 석굴사원과 마애불의 기적

     

    “산 북쪽에 천생석굴(天生石窟)이 있으니 옛적에 12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돌 빛이 결백하여 혹은 설산(雪山)이라 하며 혹은 단특산(檀特山)이라고도 한다.
    매우 기구하고 험준하여 발붙일 곳이 없다 한다.

    돌을 갈아 발 디딜 자리를 만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속에 돌이 편편하여 방처럼 생긴 곳이 있어 돌을 베개하고 누우면

    차지도 않고 훈훈하며 병자가 거주하면 병이 낫기도 한다.
    그리고 굴 벽에는 조각한 석불도 있는데 어느 때의 조성인지 알 수 없으나

    연기에 끄슬려서 알아 볼 수가 없다.
    또 굴 위에 조각한 석불에서는 자주 서광이 빛나며 산곡과 동천석굴에 비친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이 해마다 있는 것이다."
    신라 함월산기림사사적(新羅 含月山祇林寺事蹟) 중 골굴사(1740년)

     

     

    원효성사의 마지막 혼이 깃든 열반처인 관음굴의 병자 치유 기적과

    골굴사 마애여래불의 서광과 기적에 대한 조선시대 자료이다.
    사료에서 보듯이 골굴사는 인도 당시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하시고 설법하신 장소인

    히말라야(설산, 단특산)와 영축산으로 명명할 만큼

    12처 석굴과 마애여래불의 가피 공덕이 높았다 한다.

    신라 창건 당시부터 골굴사(혈사)는 원효스님의 마지막 수행처이자 열반지였고,

    현재까지도 경주 지역민들에겐 치유와 기적을 행하는 신비롭고 영험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골굴사 오륜탑(骨窟寺 五輪塔) - 부처님의 사리탑

     

    오륜탑(五輪塔)은 청정법신(淸靜法身) 대일여래불(大日如來佛)을 상징하는 만다라(曼茶羅)로서

    모든 덕과 지혜를 갖추었음을 뜻하며, 오지륜(五智輪)이라고 한다.

    불교의 수행법인 밀교(密敎)에서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오단의 형상은

    물질계인 사대(四大 : 地, 水, 火, 風)와 정신계인 空의 조화를 의미하며

    중생(衆生)의 육신과 오대(五大)를 대응시켜 자기 몸 안의 오처(五處)에 오륜을 관(觀)하여

    육신이 곧 법신(法身)임을 체득케 한다.

    1500년 전 인도(天竺國)로부터 불법을 전래한 골굴사(骨窟寺)의

    창건주 광유성인(光有聖人)을 받들어 이 탑(塔)을 조성하며

    태국(泰國)에서 모셔온 불사리(佛舍利) 삼과(三果)를 봉안(奉安)했다.

     

     

     

    골굴사 산신당 여궁(女宮)과 남근(男根)바위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한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을 수용하면서 발전해왔다.
    산 전체가 하나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골국사는 불교가 정착하기 이전부터

    바위를 신성의 대상으로 삼아 기원하는 샤머니즘 신앙이 발달했다.
    이러한 연유로 좌측의 남근바위와 정면의 산신당 여궁은 삼신을 빌어

    자손을 기원하는 동경주 지방 정신문화의 산실이었다.

    예로부터 자손이 귀한 집안의 부녀들이 남근바위를 참배하고 난 뒤

    산신당의 여궁(마루 아래 위치)을 깨끗이 소재하고 그 위에 앉아 밤새 기도를 하면

    이튿날 아침 여궁에 정수(精水)가 가득히 고이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곧 소원성취의 징표이기도 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지금도 매년 정월이면 그 인연으로 태어난 자손들과 가족들의 참배가 줄을 잇는다.

     

     

     

    골굴사 관음굴(骨窟寺 觀音窟)

     

    골굴사의 12개 석굴 중에서 가장 넓은 석굴법당으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으며,

    동굴의 벽면에는 108관음보살상을 모셨다.

    옛날에는 벽면에 마애불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흔적이 없으며,

    정동쪽을 향해 있는 입구에는 겸재 정선의 '골굴석굴도'에 있는 것처럼 목조전실을 조성해 놓았다.

    예전에는 온돌을 놓아 난방을 했으나 지금은 그냥 마루방으로 개조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석굴법당에서 잠을 자고 나면 병들고 허약한 이가 생기를 얻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법당 안에서는 청량한 기감을 느낄 수 있다.

    이곳 함월산지역은 석회암 지층으로서 제오라이트 등의 광산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암반의 성분이 맥반석처럼 인체에 유효한 발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慶州 骨窟庵 磨崖如來坐像) - 보물 제581호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다.

    조선시대 겸재(謙齋)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보물 제995호)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 동해안 지질공원

     

    골굴암 일대의 암석은 뜨거운 화산재가 굳어서 만들어진 응회암(凝灰巖)이며,

    이 암석에는 갈라진 틈이나 크고 작은 구멍이 있다.

    갈라진 틈에 의해 생성된 절벽 면에 마애여래좌상을 조각하였고, 큰 구멍은 석실로,

    큰 구멍 안팎의 작은 구멍들은 작은 불상을 놓아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편평한 면은 응회암에 생긴 절리면이고,

    석실이나 불상을 놓는 자리로 쓰이는 구멍들은 타포니에 해당한다.

     

     

     

    골굴(骨窟)

     

    區分十二天生窟 (구분십이천생굴)

     열두 개로 나뉘어진 천생(天生)의 굴은


    逈絶塵緣恒淨潔 (형절진연항정결)

    속세(塵緣)와 길이 끊겨져 항상 정결하도다.


    縹緲危巒戴月高 (표묘위만대월고)

    멀리 보이는 험준한 산이 아스라하고, 머리 위 달은 높디 높구나.


    崎嶇曲路彫崖出 (기구곡로조애불)

    험하디 험한 굽이굽이 구불한 길, 벼랑 위 바위에 여래가 새겨있고


    岩房不熱石還懊 (암방불열석환오)

    바위 속 돌방은 훈훈하여 그 속에 드니 일만 근심이 사라지는구나.


    檀木無煙焄自鬱 (단목무연훈자울)

    불에 타 그을려 흔적 없는 곳에 박달나무만이 저 스스로 우거져 있네.


    休道天西驄嶺外 (휴도천서총령외)

    길조차 쉰 이곳이 달마대사 짚신 지고 넘던 총령 아닌가 하노라.


    海東亦有眞闍堀 (해동역유진사굴)

    해동에서 참 부처님 모신 굴은 예 뿐인가 하노라.


    - 신라 함월산기림사사적 중 골굴사 부분 -

     

     

    동아보살 공덕기


    동아는 내가 골굴사 주지로 부임한 1990년 겨울에 태어나 나에게 입양되었으며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 하여 동아(冬兒)라 불렀다.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을 대중들과 함께했으며 모든 행이 예사롭지 않았다.
    참선을 하고 탑돌이도 따라하며 기도객들을 안내했다.
    보통 진도견들은 가축이나 산짐승들을 해치는 습성이 변하지 않았지만

     

    동아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KBS, MBC, SBS, 외국 TV 등에 여러 차례 방영되어 세간에 유명세를 타면서

    20여 차례 강아지를 분양하여 1,200여만 원을 사중에 보시하여

    대적광전과 선무도대학 건립에 공덕을 지었으며 유럽에까지 그의 강아지가 분양되었다.
    만년에는 치매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죽는 날 아침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했다.
    지난 음력 2월 15일 극락보전의 아미타부처님 봉불식을 하루 앞둔 3월 29일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그 나름의 생을 입적하기 위해

    동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절을 떠났다.
    10여 일이 지난 뒤 오륜탑 언덕 넘어 양지바른 곳에서 동아의 죽음을 거두었다.
    사중에서는 동아의 49재를 기부하고 매년 음력 2월 15일을 동아의 기제사일로 정했다.

    모든 불자들은 그를 동아보살이라 불렀다.
    다음 생은 꼭 사람으로 환생하여 골굴사에 출가하는 인과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이다.


    불기 2554년(2010년) 5월 16일

    함월산 골굴사 주지 설적운 합장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 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움직이는 선(禪)의 숨결, "선무도(禪武道)"

     

    선무도는 불교의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법으로 불교의 전총수행법이다.
    본래는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고 해서

    달마대사로부터 선가에 비밀리 전수되어 온 수행법이다.

    선무도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적 방편으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요가나 명상을 아우르는 관법수행법이다.

    선무도는 위빠사나 혹은 요가처럼 인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수행법으로서

    참선의 원류에 해당하며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워 익힐 수 있는 수련법이다.


    선무도는 명상, 선요가, 선기공, 선무술, 선체조 등을 포함하는 총체적 수행법으로

    현대인들의 정신적 고뇌와 신체적 질병을 가져 올 수 있는 갖가지 스트레스와

    육체의 불균형을, 선무도 수련을 통하여 건강한 몸과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

    즉, 몸과 말과 사유,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잘 살피고 정화하여 조화롭게 이끌어나감으로써 도를 이룰 수 있다.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씨,

    법명은 원효, 법호는 화쟁(和諍), 초명은 서당(誓幢)이다.
    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현재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설총의 아버지이다.
    젊은 시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자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군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십년 후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던 도중

    하룻밤을 지내게 된 토굴에서 갈증이 나 토굴 속에서 고여 있는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였고 물을 마셨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오(大悟)한 원효대사는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이나 거지 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 포교에 들어갔다.

    이후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薛聰)을 낳았고 그 후 파계(破戒)하였다.

    파계(破戒)한 후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교화한 사상으로는 인간의 원래 본성인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자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모두가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난다는 화쟁사상(和諍思想),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이 대표적이다.
    말년에는 왕궁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의하였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찬술하였다.
    분황사(芬皇寺)에서 화엄경(華嚴經),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 品疎)를 지었다.
    원효대사는 신라 신문왕 6년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골굴사(骨窟寺)

    골굴사는 선무도 수행도량으로 유명하며, 원효대사가 열반한 혈사(穴寺)로 추정되는 곳이다.

    입적 이후 가장 이른 시기에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고선사서당화상탑비(高仙寺誓幢和尙塔碑)’에 의하면 원효대사는 686년(신문왕 6년)

    70세로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살던 혈사에서 가까운 곳에

    아들 설총의 집이 위치했던 곳으로 보아 그 위치가 신라 왕경에서 멀지않은

    경주 남산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기림로 101-5 (안동리 산 304)

    선무도 총본산 골굴사 www.golgul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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