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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수경원의 정자각과 비각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0. 4. 04:11

    옛 수경원의 정자각과 비각

     

    수경원(綏慶園)은 조선 왕조 제21대 영조(英祖)의 후궁인 영빈 이씨(1696~1764)의 원묘이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두었는데 그 외아들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1764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친히 ‘의열(義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렸고,

    묘호는 의열묘(義烈墓)가 되었다.

    대한제국 광무 3년(1899) 사도세자의 4대손인 고종(高宗)은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영빈 이씨의 묘를 수경원으로 승격하였다.

    수경원은 1970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옮겨가고 1974년 대학교회(루스채플)가 들어섰다.

    무덤 속에서 3개의 석함(石函)과 두 벌의 지석(誌石), 한 벌의 명기(明器)가 출토되었다.

    왕릉이나 원에는 제례를 올리는 장소인 정자각(丁字閣)과

    비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이 있는데 현재 뜰 안에 보존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신촌동)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義烈墓(의열묘)

     

     

    백자(白磁), 영빈이씨 명기(暎嬪李氏 明器)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1호

     

    1970년 수경원 이장 후 출토된 유물이다.

    명기는 모두 20점으로 보(簠), 작(爵), 향로(香爐), 호(壺) 등 제기류를 본뜬 소형 부장품이다.

    새하얀 태토(胎土)와 유색(釉色)이 매우 정갈하고

    바닥 또한 고운 모래로 받쳐 구운 후 갈아내어 역시 정갈하다.

    특히 보(簠)는 전면에 음각문을 새겨 넣었으며, 작은 삼족형 그릇의 발이 세 개인 형태이다.

    일부가 파손되고 호의 경우 유약에 의해 몸체와 뚜껑이 붙은 것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영조(英祖), 영빈(暎嬪), 그리고 사도세자(思悼世子)

     

    영조는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의 탄생이 간절했던 상황에서

    42세(영조 11년, 1735)에 영빈 사이에서 원자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나 영조가 심혈을 기울여 시행했던 탕평의 이상이 현실의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사도세자와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영조 38년(1762) 임오화변(壬午禍變)의 참극으로 사도세자는 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에 따르면,

    영빈 이씨는 영조에게 직접 나아가 종사를 평안히 하기 위해,

    사도세자에 대한 "대처분"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한다.

    이로 인해 아들을 버린 어머니'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당시 정치 상황에서 왕실의 혈통을 지켜내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뜨거운 윤 5월 뒤주 안에서 8일 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발인 날

    아들의 관을 잡고 통곡하던 영빈 이씨는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였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들을 앞세운 2년 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영빈 이씨의 바람과 같이

    세손은 왕세자로 책봉되어 훗날 정조 임금이 되었고

    순조와 헌종에 이르기까지 혈통을 이어 나갔으니

    영조가 대의(大義)라 불렀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실록 40년(1764) 9월 26일.

     

    사도세자의 일은 대의(大義)였음을 하교하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서 세 대신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임오년(1762)의 대의(大義)를

    만약 통쾌하게 유시 하지 않았더라면 윤리가 그때부터 폐지되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만고에도 없는 지경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가 만고에도 없는 의리를 행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 너의 조모가 백세에 의리를 세웠으니,

    일거에 종사가 다시 존재하고 의리가 크게 밝혀졌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조선이 어떻게 조선이 되었겠는가? (.....) 내가 의열(義烈)로 표시한 것은

    너의 조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의 대의(大義)를 위한 것이다.

    영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세손인 정조가

    자신과 할머니 영빈 이씨를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조는 ‘의(義)’가 담고 있는 차가움에 거부감을 가졌고, 열 살 나이에

    직접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은 ‘대의(大義)’라는 명분으로 잊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정조는 할머니 영빈 이씨의 궁호를 선희궁(宣禧宮)으로 바꾸었다.

     

     

    백자청화 영빈이씨묘지(白磁靑華 暎嬪李氏墓誌)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1호

     

    첫 번째 묘지석 해설.(우로부터)

    영빈이씨는 바로 나의 후궁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아버지는 찬성(贊成)에 추증된 유빈이고 할아버지는 통훈대부 영임(英任)이며

    증조부는 학생 정립(正立)이다. 외조부는 학생 김우종(金佑宗)인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병자년(숙종 22, 1696) 칠월 십팔일에 태어났으며 여섯 살에 대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다.

    병오년(영조 2, 1726)에 비로소 숙의(淑儀)에 봉해졌고 또 귀인(貴人)에,

    이후 영빈(暎嬪)에 올랐는데 여자의 관품으로는 최고의 품계이다.

    일남 육녀를 두었다. 아들은 죽은 세자(사도세자)이다.

    빈은 홍씨인데 영의정 봉한(鳳漢)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의소세손(懿昭世孫)이고 차자는 世孫(正祖)인데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를 이었다. 장녀는 청연군주(淸衍郡主) 차녀는,

     

    두 번째 묘지석 해설

    차녀는 청선군주(淸璿郡主)이다. 또 서자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는 은언군(恩彦君)이며 둘째는 은신군(恩信君)이다.

    셋째는 나이가 어리며 현주(縣主, 세자의 서녀)가 있는데 역시 어리다.

    첫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시집갔는데 양자 상철(相喆)이 있다.

    다섯째 딸은 화협옹주(和協翁主)인데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시집갔다 양자 재선(在善)이 있다.

    여섯째 딸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시집갔는데

    양자 후겸(厚謙)이 있으며 또 어린 딸이 있다.

    내가 임금이 된 지 2년여 영빈이 나의 후궁이 되었으며

    40년 갑신(1764) 7월 26일 병시에 경희궁(慶熙宮) 양덕당(養德堂)에서

    나를 하직하고 세상을 버렸으니, 오호라, 다시 볼길 없게 되었도다.

    삽십구년간 해로(偕老)하였는데 지금 한바탕 꿈이 되고 말았으니.

     

    세 번째 묘지석 해설

    내 슬픔이 너무나 길도다. 다섯 달만 더 살았더라면 칠순이 되었을 것을,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일이로다.

    빈(嬪)은 성품이 온순하고 자애로워 나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여러 자식을 고루 사랑하였다.

    더욱이 임오년 일에 있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훈신(勳臣)과 백성을 보호한 것은 빈의 공이다.

    이것이 어찌 아녀자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내가 어찌 조금이라도 과장하여 말하겠는가

    이는 온 나라의 선민들이 다 함께 말하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애통함을 참고서 3년을 보내고 사도세자의

    담제(禫祭, 탈상)가 든 달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빈은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으며 아내로서 속임이 없었으니

    정말 신하로서나 아내로서나 부족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아 슬프도다. 빈이 죽은 후에 삼일간을 그대로 궁중에 머물게 하여 내가 친히 가 보았으며

    그날 밤, 견여(肩輿)로 장동(壯洞) 사저에 운구하여 성빈(成殯, 빈소)하게 하니.

     

    네 번째 묘지석 해설.

    이는 옛날에 없었던 일로서 세손(正祖)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8월 그믐에 내가 직접 빈소로 가서 관 위에 ‘상(上)’자를 쓰니 내 마음에 서운함이 없다.

    또 수의보사(守義保社, 의리를 지켜서 사직을 보호하였다.) 네 글자를 직접 써서 내리고

    묘호를 의열(義烈)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러니 죽은 뒤의 영예가 매우 극진했다고 할 것이다.

    9월 27일에 양주 연희궁 대야동 미향(未向, 남남서) 언덕에 예를 다하여 장사 지냈다.

    아아 내 나이 일흔한 살에 빈의 묘지를 직접 짓고

    빈의 묘포 앞뒤와 광중(壙中)의 명정(銘旌)을 모두 썼다.

    그리고 신주의 앞뒷면 또한 모두 임금의 필적이다.

    이는 참으로 일반적인 규례에서 벗어난 뜻밖의 일인

    것이다. 황조 승정 무진 기원후 삼갑신(三甲申)이 되는 해인

     

    다섯 번째 묘지석 해설.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주상전하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星功神化主上殿下)

    40년 9월 일에 금성위(錦城尉) 신(臣) 박명원(朴明源) 삼가 명을 받들어 쓰다.

     

     

     

    영빈행장(暎嬪行狀)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지은 할머니 영빈이씨(暎嬪李氏)의 행장

     

     

    여범(女範)

     

    영빈(暎嬪)의 친필 총 4권으로 구성.

    이름난 황제의 아내인 성후를 비롯하여 어진 어머니로서의 몸가짐,

    효도를 앞세우는 효녀, 문인과 무인의 아내로서의 삶,

    아내의 길을 지키는 열녀 등 123명의 여인에 대한 내용

     

     

    고문진보언해(古文眞寶諺解)

     

    영빈이씨 소장 책. 영빈이씨의 장서인 영빈방인(暎嬪房印)이 찍혀있다.

    중국 송나라 황견(黃堅)이 편찬한 중국 시문선집인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언해한 책.

    고문진보는 조선시대에 문장 학습용 교재로 가장 널리 읽혔던 책으로

    여러 본 중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이 가장 보편적으로 읽혔는데

    이 책 또한 상설고문진보대전을 저본으로 삼아 발췌하여 언해한 것이다.

    한글 표기법이나 장서인(藏書印)으로 미루어 영조 연간(1694~1762)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18세기 한글 어휘를 살피는 중요한 자료이다.

     

     

    어제 표의록(御製 表義錄)

    세손 의소(懿昭)와 서로 의지하도록 하고, 도성 지척 연희궁에 있게 하였다.

    영조는 영빈의 장례 치르기 전에 의소(영조의 세손, 영조 28년에 사망)의

    묘소(서대문구 북아현동 소재, 1949년 서삼릉에 이장)에 거둥 하였다가 갑자기 영빈방에 들렀다.

    <영조실록> 40년(1764) 8월 30일. 영조는 친히 표의록을 짓고

    영빈의 묘소를 서교(西郊) 연희궁으로 정하라고 명한 다음 하교하기를 땅은 양주 땅이지만

    도성과 지척으로 가까우니 (...)라고 하였다. <영조실록> 40년 9월 3일.

     

    교지(敎旨)

    임금이 대신과 예조 당상에게 문의하여 특별히 영빈 이씨에게 의열(義烈)이라 증시(贈諡)하고

    교서와 제문을 몸소 지어서 본궁에 거둥 하여 시호를 내리는 예를 행하니...

    <영조실록> 41년(1765) 7월 11일.

     

     

     

    수경원 지록(綏慶園 誌錄)

     

    수경원 조성 기록. 원(園)의 격식을 맞추기 위하여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 건물과 석물 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의열묘도(義烈墓圖)

     

    영조는 영빈이씨의 묘를 연희궁터 안에 조성하라고 하고 의열이라는 묘호를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능 조성 후 이를 묘사한 그림으로 1764년으로 추정된다.

     

     

    비각(碑閣)

     

    대한제국, 1900년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비를 세워 두었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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